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본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이바라기 노리코는 오사카 출신의 시인으로 제국여자약전(현 토호東邦대학) 약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제국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보고 극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 희곡·동화 등을 쓰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결혼 후, 잡지 등에 시를 투고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낸 「내가 가장 예뻤을 때」란 시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국내에선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 문학의 번역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55년 『대화』를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배달부』『진혼가』등을 발표하고, 1990년에는 『한국현대시선』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명시들을 일본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살해사건을 다룬 「장 폴 사르트르에게」, 고대 일본 이주민들의 차별대우를 고발한 「칠석」 등 한국을 소재로 한 시를 여럿 발표했다. 대표시집으로는 『자기의 감수성 정도는』『보이지 않는 배달부』『진혼가』 등이 있으며, 전후 여성 시인 중에서 가장 폭넓은 사회의식과 건전한 비평 정신을 보여 준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우경화를 신랄하게 비판한 만년의 시집 『기대지 말고』는 일본 사회의 반민주적인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표적인 지한파 시인으로 한국의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풍속,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의식 있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얼마나 도저한 순정함인가? 시오노 나나미 할망구가 역사의 왜곡도 서슴지 않는 탐욕의 지식인이었다면 이바라기 노리코는 진정한 전후 일본의 지성인이었다. 뒤늦은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 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다
나는 무척 덤벙거렸고
나는 너무도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전문
어떤 식으로 울었을까 / 어떤 식으로 소리치고 / 어떤 식으로 꽁해 있었을까 /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건 / 이미 / 호의를 가졌다는 증거 / 눈만 큰 아이였을까 / 아마 맹한 아이였을 걸 / 바스락 바퀴벌레 눈치 없는 벌레인가 / 미소 지으며 /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 호의 이상의 감정이 생긴 증거 / 그때도 그랬다 / 수염 건너로 나는 보았다 / 꾸정모기 닮은 어린 시절의 얼굴을 / 그때도 그랬다 / 몽롱한 노파의 끝없는 말을 나는 듣고 있었다 / 어린 시절의 찢어지는 사투리를―「어린 시절」 중에서
처음 가는 마을에 들어갈 때 / 내 마음은 살짝이 두근거린다 / 소바집이 있고 / 초밥집이 있고 / 청바지가 걸려있고 / 모래 먼지가 있고 / 자전거가 방치되어 있는 / 특별할 것 없는 마을 / 그래도 나는 충분히 두근거린다 / 눈에 선 산이 우뚝 서 있고 / 눈에 선 강이 흐르고 있고 / 몇 개의 전설이 잠들어 있다 / 나는 금세 발견한다 / 그 마을의 점을 / 그 마을의비밀을 / 그 마을의 비명을 / 처음 가는 마을에 들어갈 때 /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 방랑객처럼 걷는다 / 설사 볼일이 있어서 왔을지라도 / 맑은 날에는 / 마을 하늘에 / 아름다운 파스텔 색 풍선이 떠다닌다―「처음 가는 마을」 중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 이 꾸러미의 끈 어떻게 / 푸느냐고 묻는다 / 어떤 사람이 와서 / 뒤엉킨 실 묶음 /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한다 / 가위로 자르라고 조언하지만 / 싫다고 한다 / 할 수 없이 돕는다 꼼지락 꼼지락 / 살아있는 인연으로 / 이런 것이 살아있다는 / 그런 것인가 그렇지만 별로 / 휩쓸리고 / 휘둘려 / 지치고 지쳐 / 어느 날 갑자기 깨닫는다 / 어쩌면 아마 / 수많은 친절한 손이 도와주는 것이다 / 혼자서 처리해 왔다고 생각하는 / 나의 여러 연결점에서도 / 여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티 내지 않고―「지천명」 중에서
사랑스러운 사람에게는 / 많은 별명을 붙여주자 / 작은 동물이나 그리스 신 / 맹수 같은 것에 비유해서 / 서로 사랑한 밤에는 / 부드러운 말을 / 살짝 해 주러 가자 / 어둠을 틈타서 / 아이들에게는 / 이야기란 모든 이야기를 해 주자 / 나중에 어떤 운명이라도 / 피구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 만원 전철 안에서 / 세게 발을 밟히면 / 크게 소리치자 멍청아! / 대체 남의 발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삶의 한계선을 침범당하면 / 말을 발사하는 것이다 / 러셀 언니의 두 자루 권총처럼 / 백발백중 속 시원함으로 / 말 / 말 / 여자의 말 / 부드럽고 향이 가득한 /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살아있는 것 / 아아 / 그러나 우리 고향에서는 / 여자의 말은 규격품 / 생기 없는 냉동품 / 쓸쓸한 인공 호수다! ―「여자의 말」 중에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은영 소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중에서 (0) | 2019.01.16 |
---|---|
존재에 대한 자신만의 사랑법 혹은 함께 지나온 시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 (0) | 2018.12.23 |
2018학산마당극'놀래' 심사평 (0) | 2018.10.22 |
[서평] 불면은 때때로 나를 깊게 만든다 (0) | 2018.08.12 |
소창, 그 흰 빛에 담긴 삶의 정조와 그리움을 복원하다 (0) | 2018.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