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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4)-화백 오석환 본문

리뷰

인천의 예술가(4)-화백 오석환

달빛사랑 2019. 9. 15. 03:17





본디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실의 예술가에게 있어 삶(생활)과 예술 사이의 긴장은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둘 중 어느 것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가에 따라 예술의 성격과 미적 성취의 결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지나치게 비중을 둘 경우 그의 예술은 비루해지거나 상투성에 매몰될 위험성이 있고 예술에 지나치게 비중을 둘 경우 해당 작품에는 삶의 생생함이 녹아들지 못해 대중과의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팽팽한 긴장관계를 자연스럽게 유지하며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고 아울러 삶의 가치도 제고하게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어려운 작업을 한결같이 해오고 있는 이가 바로 오석환 화백이며 그의 예술가로서의 위상이 만만찮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석환 화백은 1925413, 황해도 해주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김명철 씨가 건축업과 제과업을 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을 그리 빈곤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해주제일공립보통학교 재학 당시 그림으로는 최고라는 칭찬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해방되기 전 일본인 중학교 미술교사로부터 동양화의 기초를 터득하였고 해방 후에는 해주에 조직된 최초의 미술가 조직인 해주미술가동맹에 잠시 가입하지만 배울만한 스승도 없고 미술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 월남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셋.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박영동, 박성환, 박황섭, 황추 선생 등도 당시 인천으로 월남한 해주 출신 화가들이다. 특히 황추 선생과는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박성환, 박황섭 씨 등과는 고향에 머물던 당시 정각사라는 사찰에 모여 같이 그림도 그리고 예술과 삶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물론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는 물자가 풍부하지도 않았고 미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부친은 화가 말고 다른 삶을 살아주길 바랐지만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생활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거나 부업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 아버지 덕분에 직장이나 별다른 부업 없이 그리만 그릴 수 있었다.

 

그가 남으로 내려와 최초로 도착한 곳은 초상화 청탁을 하러 해주까지 올라온 사람을 따라 도착한 충남 당진이었다. 21살 때부터 이미 그는 초상화를 잘 그린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해주 지역의 유력 인사들의 초상화는 대체로 오석환 화백이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초상화는 수묵화로 그렸다. 이후 서울 이태원, 삼각지로 올라와 미군 상대로 초상화를 그리며 본격적인 남한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가족들도 모두 남한으로 내려왔고 오석환은 다시 그림 작업과 전시장을 알아보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는데 그 즈음 한국전쟁이 발발해 이태원의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대구에 머물 수도 없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석환은 1군단 정훈감으로 자원입대를 했고 북진하는 부대를 따라 함경북도 성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원산까지 후퇴하기도 한다. 그러다 부대가 강릉에 진주하고 있을 때 마침내 상급자의 허락을 받고 이태원 집에 가보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부모님이 폭격으로 돌아가신 후였다. 큰 충격을 받은 오석환은 곧바로 귀대를 하지 않아서 탈영병 신세가 되었으나 나중에 육군본부가 사정을 알게 되어 다시 정훈감실 문관으로 복귀하였다. 정훈감실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포스터나 초상화를 그렸고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이 선물로 사용할 대가들의 그림을 매입하는 역할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만나게 된 사람이 산수화의 1인자 청전 이상범 선생이었고 이후 누하동에 있던 청전 선생의 사숙(私塾)에 들어가 그로부터 유의미한 지도를 받게 된다.

 

청전 선생에게 수묵산수화를 지도받은 받은 오석환 화백은 국전 6, 7회에 연이어 입선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전을 비롯한 화단의 여러 비리와 부패로 인해 끝내 특선을 받지 못한 그는 더 이상 국전 출품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면서 채색화가로 일대 변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히려 오석환 화백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화풍에 있어 혁명적 변화였기 때문이다.

 

군에서 제대한 후 그는 삼각지로 돌아가 잠시 머물다가 인천 부평으로 내려오게 된다. 부평에도 미군기지가 있었고 초상화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부평에 내려왔을 때는 이미 인천미술협회가 창립되어 있을 때였고 그는 이듬해에 미술협회에 가입을 했다. 이 때 미리 인천에 내려와 신포동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초등학교 동창인 황추 선생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당시 미술협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인물로는 황추 선생 이외에도 김영건, 이경성, 박세림, 장인식, 황병식 선생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인천 1세대 화가들과 함께 미술활동을 하게 되면서 인천은 오석환 화백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는 부평을 거쳐 신포동, 율목동, 내동 등 인천 중구 일대를 떠나지 않고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인천문화재단 구술채록 팀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과연 예술이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고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예술이라는 것은 생활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생활은 작가의 교양으로써 철학적으로 모든 것을 발상하고 구상해 나가고 (……) 예술성이 무엇이냐를 설명하자면 자기 생활의 가장 특이한 것이고 사회적인 관계가 연결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죠.”라고 대답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발언을 통해 볼 때 그에게 있어서 삶과 예술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그의 화가로서의 초창기 활동 연혁을 살펴보면 화가 즉 예술가로서의 오석환과 생활인으로의 그의 전사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는 삶을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림 속에서 삶의 보람과 희망을 확인했다. 예술은 그의 삶을 매순간 그윽하게 고양시켰고 치열했던 삶은 그의 예술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이렇듯 그의 예술에 대한 겸손한 자세와 삶에 대한 치열함은 약간의 작품상의 변주와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최근까지 그의 예술세계를 조형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이창구 화백의 진술은 핵심에 닿아 있는 평가라 할 수 있다.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에 대해 자유로운 접근과 조망을 위해, 올려보는 시점의 고원(高遠)과 수평적 눈높이의 평원(平遠), 내려다보는 심원(深遠)의 원근법을 바탕으로 그려왔다. 이는 곧 존경과 겸손의 마음이요 평등의 마음이며 자비와 배려의 마음이기도 하다. 오석환 화백은 실경을 전제로 자연의 이치를 담은 마음속 산수화를 즐겨 그려왔다. 관조하듯 펼쳐진 그림 한가운데 우뚝 자리한 바위산은 거칠고 중첩된 묵색에 의해 그 만큼이나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림에 생기를 불어 넣는 돌 틈 사이 흐르는 물줄기는 시대의 흐름 안에서 유연하게 살아온 그의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실경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삶의 현재성과 리얼리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마음속 산수화를 그린다는 것은 그가 현실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자신만의 예술적 감수성으로 새롭게 창조해 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의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화폭에 담긴 이미지와 그것의 미적 성취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다시 말해 철학적 사색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얼마나 즐겁고 의미 있는 순간일 것인가. 오석환 화백의 작품을 한결같이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문계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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