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3)-배우 정진 본문
오래 전 MBC에서 방영한 사극 <조선왕조5백년> ‘설중매’ 편에서 칠삭둥이 한명회를 연기한 작은 체구의 한 배우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당시 시청자들은 마치 역사 속 실재 한명회가 현현(顯現)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극중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그의 연기에 대해 찬탄을 연발했다. 수백 년 전 인물이니 본 적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사람들은 만약 한명회가 살아 돌아온다면 아마도 그와 같은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그의 연기는 생생했다. 그는 이 연기로 제23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1년 후 시청자들은 같은 시리즈 ‘임진왜란’ 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분한 그를 다시 만난다. 그는 이 드라마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조선침략을 획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완벽하게 변신하여 시청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각각의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해당 작품의 줄거리와 인물의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배우와 실제 인물을 착각하게 만드는 메서드 연기를 선보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인천 출신 배우 정진(鄭珍, 본명 정수황)이다.
배우 정진은 1941년 11월 22일, 평안도 진남포 출신으로 중국 천진의 군량성(軍糧城)에서 정미소 기술자로 일하던 아버지 정용풍 씨와 충남 서산 출신 어머니 최정자 씨 사이의 3녀1남의 막내로 태어났다. 해방이 되던 해, 다섯 살의 나이로 귀국을 하여 화평동 249번지에 자리 잡은 그는 1948년 축현초등학교 입학하고 1954년 동산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 재학 당시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하던 그는 영화관을 자주 출입하며 각종 쇼와 여성국극, 만담, 구봉서, 김희갑 등이 주연을 한 코미디 영화들을 보면서 배우의 꿈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그래서 무용을 하던 랑승일이 만든 미추홀예술학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백철의 『문학개론』 부록에 나와 있던 ‘희곡론’을 가지고 연극을 공부했다. 미추홀예술학원은 경영난으로 이내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그의 꿈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동산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연극반을 결성하여 유치진의 작품 <별>을 연습하기도 했지만 학교로부터 예산이 나오질 않아 공연까지 이어진 못했다.
이후 연극에 대한 꿈의 실현을 위해 서라벌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서라벌고등학교가 서라벌예술대학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체계적으로 연극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착각에 불과했다. 서라벌고는 동산고와 마찬가지로 그저 인문계 고등학교였을 뿐이지 연극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학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를 뛰쳐나와 곧장 충무로로 나가 한국배우전문학원을 다니면 체계적으로 연극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후 교육행정이 촘촘하지 못했던 시절, 비공식적 루트를 통해 마련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1960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학과장은 동랑 유치진 선생이었고 이해랑, 양동근, 이근삼 선생 등이 연기와 이론을 강의했다. 그 중 특히 이해랑 선생의 눈에 띄어 1962년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그 얼굴의 햇빛을>로 정식 데뷔했다. 특히 1968년에는 은사 이해랑과 이동극장을 운영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 공연은 주로 몰리에르나 셰익스피어 작품을 번안하여 올렸고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연극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가볍고 재미있게 접근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연극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돈과 인기에 연연해하지 않는 성정인데다가 정통연극만 고집했으니 생활의 어려움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얻게 되면서 연극배우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의 버거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그는 1979년 TBC 동양방송 특채로 텔레비전 드라마에 처음으로 출현하게 되었고 1973년에는 영화 <오타 줄리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데뷔하여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영화나 텔레비전 배우로서의 입지가 굳건해질수록 연극 무대에 대한 그의 갈증 또한 나날이 증폭되었다. 그의 배우로서의 정체성은 바로 연극무대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TV와 영화, 각종 광고에 출연하면서 얻게 된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다시금 새롭게 연극무대에서의 삶을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물론 TV탤런트나 영화배우 활동을 하면서도 간간히 인천에 내려와 레스토랑이나 다방을 빌려 단막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살롱드라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보다 적은 손님이 들자 해당 공간의 주인들은 공간 제공에 난색을 표명하기 시작했고 1984년, 결국 그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경동예술극장’을 개관하여 본격적인 인천 연극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이것은 척박했던 인천 연극계와 후배들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진 자신에게도 일정한 성취감을 주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연극적 인프라는 여전히 빈약하고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관극(觀劇) 마인드 역시 건강하게 정초(定礎)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년 후 심각한 경영난에 휩싸이게 된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 중 상당수가 이러저러한 인맥을 통한 초대권 관객들이었기 때문에 운영비는 물론 가정경제를 꾸려갈 최소한의 경비조차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경동예술극장은 베케트의 ‘연극’을 개관공연으로 올린 이후 4~5년만인 1987년 ‘콜렉터’를 마지막으로 올린 후 문을 닫게 된다. 하나의 예술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해당 예술가의 열정과 노력만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외적 조건들이 아울러 성숙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뼈아픈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인천 연극에 대한 정진의 애정은 상기(上記)한 것만이 다가 아니다. 그는 인하대학교 연극 동아리인 인하극예술연구회의 공연에 1회부터 결합하여 78년까지 다섯 차례나 연출을 맡거나 극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공연했던 작품들은 <자유결혼>, <딸들, 자유연애를 구사하다>, <개방병실>, <서쪽마을 장난꾸러기>, <용감한 사형수> 등 단막과 장막을 막론하고 두루 망라되었다. 정진은 연극하는 사람으로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연극에 대한 매력’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생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후 이러한 인천 연극에 대한 사랑은 시립극단 4대 예술 감독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진은 모 매체(‘인터뷰365’, 2009.4.30.)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배우는 없습니다. 물론 신체적 조건이야 타고 날 수 있지만 배우는 모름지기 자신과의 투철한 싸움이죠. 열심히 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주름진 얼굴에 작달막한 키, ‘합죽이’ 김희갑을 닮았던 그는 결코 준수한 용모의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대로 타고한 신체적 조건과 상관없이 작품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가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자신과의 투철한 싸움에서 승리한 배우였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이승의 무대에서 그를 만날 수는 없지만 연극과 연기에 대한 그의 투혼과 열정, 그리고 인천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영원히 대중들의 마음속에 남아 그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문계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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