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6)-지휘자 윤학원 본문

리뷰

인천의 예술가(6)-지휘자 윤학원

달빛사랑 2019. 10. 13. 15:04




 

지휘자 윤학원을 언급할 때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한국합창계의 대부혹은 한국합창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전설적 지휘자등등이다. 6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합창과 지휘라는 음악가로서의 한 길만 걸어온 그에게는 당연한 헌사이자 수식어일 것이다. 훌륭한 합창은 단원 하나하나의 목소리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때 완성될 수 있는 조화의 예술이다. 그리고 지휘자는 각 사람의 개성을 정확히 타산하여 서로의 개성들이 부딪치고 엉키어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목소리의 성격과 성량을 조율하여 끝내는 조화를 이루도록 이끄는 무대 감독이자 공연의 길라잡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휘자에게는 리더십뿐 아니라 단원 하나하나의 음악적 감성을 극대화시켜주고 현장에서 음악적 시너지를 창출하게 만들어주는 공감능력 또한 필요한 법이다. 윤학원은 그 모든 것을 온전히 구현해 낸 탁월한 마에스트로 중 한 명이다.

 

윤학원은 1938년 황해도 옹진에서, 강화도 교동 출신 아버지 윤효진과 황해도 장연 출신 어머니 이소재 사이의 10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그곳에서 살던 그는 6.25사변 1년 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부모님과 함께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인천으로 내려왔다. 옹진에서 생활할 때는 부모님이 잡화점을 운영하였고 장사도 비교적 잘 되는 편이었지만, 인천으로 내려와서는 주로 어머니가 운영하는 양장점 수입이 가장 경제를 지탱하는 주된 수입원이었다.

 

해방되던 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당시 음악 교사였던 여()선생님은 손풍금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곤 했는데 학생 중에서도 윤학원의 노래 실력이 출중해 다른 반 수업에도 그를 불러다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때 마음속으로 , 나는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그는 자연스럽게 성악가를 꿈꾸게 되었다. 또 크리스천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교회를 다니며 찬송가를 많이 부르곤 했는데, 그러한 경험 역시 음악과 친숙해질 수 있는 동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전쟁이 났을 때 윤학원의 가족들 역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는데, 웅천 앞바다에서 타고 가던 배가 암초에 부딪쳐 생사의 경계에 서게 되었다. 마침 그곳 마을 사람들이 뗏목을 가져와 구조해주었고 그것을 계기로 충남 보령시 웅천읍 앞 무창포에서 서너 달 살았고 다시 웅천읍으로 들어가 꽤 오래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웅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천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내 추산중학교로 전학을 간다. 추산중학교 시절에는 친구 임종빈과 더불어 콩쿠르에 나가 각각 1(임종빈)2등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인천으로 올라와서는 크리스천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영화중학교로 편입을 한다.

 

영화중학교 재학시절 그곳에는 테너이자 오페라 가수였던 백석두 선생이 재직 중이었는데, 윤학원은 그에게 레슨을 받으며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애관극장에서 열린 학생콩쿠르에 학교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음악가의 꿈을 꾸던 그가 만난 첫 번째 쓰라린 경험이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울면서 무대를 내려왔던 것이다. 변성기가 찾아왔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어린 마음으로는 성악은 이제 끝인가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우리 사회에는 예술을 하면 밥 굶기 십상이라는 통념이 자리 잡고 있을 때여서 크리스천인 까닭에 의식이 비교적 깨인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조차 성악가의 꿈을 접고 과학자의 길을 가라고 종용하였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종용에 따라 인천공고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마침 인천공고에는 밴드부가 있었다. 윤학원은 입학하자마자 밴드부에 가입해 처음으로 테너색소폰, 드럼 등의 악기를 배웠다. 하지만 변성기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3시절부터 고1때까지 율목교회에서 만난 인천중학교 음악교사였던 양윤식 선생에게 레슨을 받았는데 그때까지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아 결국 성악을 포기하고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향 전환은 그에게 탁월한 작곡가 최영섭 선생을 만나게 해준 계기가 되어 주었다. 작곡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면서 스스로 최영섭 선생을 찾아갔던 것이다.

 

윤학원에게 있어 율목교회는 신앙생활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음악적 진로를 결정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곳이기도 하다. 윤학원이 율목교회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성가대 지휘를 맡았던 연세대 출신 전석환 선생은 헨델의 메시아전곡을 대원들에게 가르쳐주었고 고등학생임에도 윤학원은 이때 생애 최초로 그 어렵다는 메시아 전곡을 불러보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전석환 선생은 또한 네가 작곡을 하길 원한다면 연세대학을 가야 된다고 조언을 해주었고 그의 조언에 따라 윤학원은 연세대 작곡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은사였던 나운영 선생을 만나 작곡은 물론 음악적 스타일을 포함한 다양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후 윤학원은 자신의 입학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간 전석환 선생의 뒤를 이어 율목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6개월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 한국오페라합창단에 입단하였다. 한국오페라합창단 시절에는 바리톤 파트를 담당했고 주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성악가들로는 윤치호, 김신자 교수 등이 있다.

 

그는 대학시절 또 다른 은사였던 곽상수 교수로부터 보이스 콰이어를 처음으로 배웠고, 이를 실험해 보기 위해 송현동 일대 아이들을 모아 직접 소년합창단을 만들기도 했다. 보이스 콰이어란 일반적인 소년합창단의 발성법과는 달리 비엔나 보이스 콰이어처럼 소리가 두성으로 올라가는 발성법으로 노래하는 합창단이다. 윤학원이 조직한 합창단은 이후 훈련을 거듭한 끝에 신신예식장에서 공연을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이 합창단은 나중에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KBS 방송에도 출연하는 등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다. 윤학원이 연세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다.

 

대학졸업 후에는 동인천중고등학교에 취직해서 약 3년여 간 음악교사 생활을 하였고 이후 자유공원 근처에 있던 극동방송에 입사해 합창단 지휘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전방위적 활동을, 인천시절과(4~5) 서울시절 포함하여 12년 간 지속하였다. 그리고 1970년 선명회합창단 지휘자가 되어 숱한 해외공연을 다니며 대한민국 합창의 위상을 드높이게 된다. 특히 1978년 유럽방송연맹이 영국에서 개최한 세계합창경연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국내 합창단이 해외에서 입상한 첫 번째 사례였다.

 

대우합창단,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서울레디스싱어스, 중대 마스터코랄 등 다양한 합창단에서 지휘를 맡아오던 윤학원은 1995~6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및 지휘자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인천합창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2009년 미국합창연합회 창립50주년 기념으로 열린 세계4대합창단 초청공연 시 부른 <메나리>는 레퍼토리 중 첫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천여 명의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것은 미국합창지휘자연합회 50여 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합창 철학에 대해 지루하면 안 된다. 사람들에게 () 새로움을 줘야 한다. 연주자는 꼭 그 음악에서 진실성을 확보해야하고, “청중만 따라가면 유치해지니까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합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일까. 백발의 노 지휘자가 선보이는 공연에는 많은 찬사가 뒤따랐고 현장은 감동의 도가니 되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미쁜 일은 그가 여전히 현직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추구하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조율한, 그리고 연주자들의 진심이 느껴지는 감동적인 공연을 앞으로도 계속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인천시민으로서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 : 문계봉 시인]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