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2)-화백 이철명 본문
한때 매체와 비평을 독점하고 있던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판도 속에서 인천은 문화예술의 척박한 변방으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마치 실력이 출중한 예술가들만이 서울의 문화권력의 자장(磁場) 안에 편입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만 고향을 지킨다는 말도 안 되는 변방 인식은 이후 인천문화예술의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무척이나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편견과 왜곡된 인식을 타격하며, 지역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꿋꿋하게 확장해 나간 예술가들의 분투가 있었기에 오늘의 인천문화예술은 인천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과 더불어 꾸준히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천문화예술의 정초기(定礎期)에 전 방위적인 미술작업과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인천의 예술을 주변이 아닌 중심부 예술로 명실상부하게 고양시킨 1세대 예술가들이 있었으니 그 탁발(卓拔)한 예술가 중 한 명이 바로 이철명 화백이다.
이철명 화백은 1935년 9월 19일, 인천 숭의동에서 출생했지만 원적(原籍)은 평안남도 평양시 중화군 해압면이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귀국해서는 신흥동에 자리 잡고 있던 ‘스타 사이다’ 공장의 공장장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이철명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인천문화재단과 나눈 인터뷰(2006년)에서, 숭의국민학교 재학 당시 그의 집에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고가인 라디오와 자전거가 있었으며 학교 교사들에게 자주 회식을 시켜주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사실인 듯싶다.
이철명은 숭의국민학교 3학년 재학 중인 1944년, 대동아전쟁 말기 일본의 소개 명령에 따라 평양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평양사범학교부속소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해방을 맞는다. 그리고 북조선노동당의 권력이 안착되며 지주와 자산가들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되기 시작할 때쯤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숭의국민학교 5학년에 다시 편입하게 된다.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철명은 약 3년간의 북한 생활을 통해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즉 해방되던 해에 담임 선생님과 모란봉, 대동문, 능라도 등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교내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의 이러한 사생(寫生)과 출품 경험은 이철명 자신이 향후 화가로서의 전망을 구체화하는데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동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인천미술협회 초기 멤버인 김찬희 선생과 연세대(당시에는 연희전문) 철학과 출신 김상유 선생을 만나 본격적인 ‘소년 화가’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당시 이철명은 김상유 선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특히 그에게 마티스, 고갱, 세잔느, 반 고흐 등에 대해 배우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이경성 선생이 관장으로 있던 자유공원 인천박물관(과거 세창양행 사택)에서 동산중학교 교내전이 열렸고 이때 그림 두 점을 출품한다. 당시 입상자에게 줄 상장의 글씨는 우초(又樵) 장인식(張仁植) 선생이 직접 써서 나눠줬다고 한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6월, 경복궁에서 열린 ‘전국중학교미술전람회’(1950.6.1.~30)에 작품 두 점을 출시해 입선을 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전시회를 보러갔다가 액자에 담긴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무척 감개무량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달 25일,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결국 그 그림들은 회수하지 못한다.
이후 이철명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문계가 아닌 인천기계공고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당시 미술선생님도 없고 정전(停戰)도 되지 않은 때라서 자신이 미술부장이 되어 미술부 학생들을 데리고 청관, 연안부두 등 인천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만난 풍광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철명이 소년기를 벗어나 청년기로 접어드는 시기에 이렇다 할 스승이나 체계적인 가르침 없이 스스로 자신의 미술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후일 이철명이 특정한 경향이나 사조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미술사에 있어서 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김인환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오랫동안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불모의 상황을 면치 못했던 미술계에 새롭게 발돋음 하는 대전환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도한 흐름은 인천도 예외는 아닐 것이며 그 뜨거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2~30대를 보낸 이철명에게도 이 시기는 예사롭지 않은 모색과 실험, 창의와 실천의 시대였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20대 중반의 가슴 뜨거운 청년 시절 장선백, 박영성, 황추 등과 함께 개최한 <앙데팡당전>은 당시 미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낡은 것에 대한 극복의지가 얼마나 심장(深長)한 것이었는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젊은 시절 내내 유화만을 그려왔던 그는 1981년 수채화의 세계를 새롭게 선보이며 변화된 미술세계를 열어 보이는데, 이러한 변화의 동력 역시 낡은 것, 정체된 것에 만족할 수 없는 그의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성정이 반영된 것이란 생각이다.
검여 유희강, 동정 박세림, 고여 우문국, 김학수, 최석재, 김영건, 이무영 등과 같은 미술계 선배들을 비롯하여 최병구, 조병화, 손설향, 김양수와 같은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척박했던 인천 문화 중흥의 초석을 다진 선배들의 소중한 예술적 자산은 그대로 이철명에게 문화적 자양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이후 이철명의 활동과 관심 분야는 미술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가이자 연구자이고, 조직행정가이자 향토자료수집가이기도 하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앞 선 시대의 소중한 자료들이 지금처럼 향토사학자들이나 후학들의 연구에 유력한 기반이 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미술협회와 예총의 은성(殷盛)한 역사 또한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인천시립합창단과 시립무용단 창단에도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인천수채화협회>, <다리회>, <인천 조각회> 등을 만들어 인천미술의 기초를 다진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올해로 85세가 된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젊은 시절만큼의 다작은 아니겠지만 그는 여전히 화폭과 붓을 놓지 않고 있으며 수많은 자료와 생생한 구술을 통해 인천 문화예술계는 물론 미술계에서 소중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의 미술계가 이철명 한 사람에 의해서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조형(造形)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동시에 이철명을 배제하고 인천의 미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퍼즐조각을 놓치게 되는, 다시 말해 온전한 퍼즐을 완성하기에 불가능한 일이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나를 비롯한 인천문화예술계가 그의 노익장(老益壯)을 계속 지켜볼 수 있게 되기를 한결같이 소망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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