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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1)-작곡가 최영섭 본문

리뷰

인천의 예술가(1)-작곡가 최영섭

달빛사랑 2019. 7. 16. 23:57




구름 산(雲山)* 저 너머 금강산을 노래한 인천의 예술가 : 작곡가 최영섭

  

문계봉(시인)

작년 봄, 북한의 최고 존엄이 성큼성큼 판문각 계단을 내려와 분사분계선을 넘은 후, 남한의 대통령과 포옹을 하고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엄청난 감동을 동반한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때의 감동이란, 늘 노랫말 속에서만 불리워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금방이라도 도래할 것 같은 벅찬 감동, 바로 그것이었다. 비로소 우리는 육로로 북한 땅을 밟으며 백두산 천지에서 호연지기를 느껴보고 그리운 금강산의 빼어난 풍광을 시청후미촉 오감에 더해 공감각적으로 느껴볼 날이 왔다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후에 펼쳐진 정치 지형은 생각만큼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 그 누구보다도 벅찬 감회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을 인천의 예술가가 있다. 바로 구순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로 유명한 최영섭은 일제강점기였던 19291128, 인천광역시(당시에는 경기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77번지,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강화 길산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인천창영초등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는데, 집안의 차남이었던 선친은 아예 호적을 인천 화평동으로 옮기게 되고, 이때부터 최영섭은 명실상부 인천사람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인천중학교에 입학하여 밴드부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 당시 플루트와 클라리넷 트럼본, 트럼펫 등 다양한 악기를 접하면서 사춘기 감성 속에 본격적인 음악의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여러 악기 중에서도 클라리넷과 플루트 연습을 제일 많이 했다고 한다. 이후 경복중학교로 편입하여 임동혁 문하에서 작곡법을 사사하였다. 1947년 서울 경복중학교 6학년 때 첫 작곡 발표회를 개최하였고 오르간 연주가로도 데뷔하였다. 임동혁 선생은 최영섭의 첫 번째 음악 스승인 셈이다. 그에게 있어 두 번째 음악 스승은 서울대 재학시절 만난 김성태 선생. 최영섭 선생은 자신의 스승인 김성태 선생의 100세 기념 헌정 연주회를(20091110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동료들과 함께 열어주기도 하였다.

  

그의 음악세계를 형성한 가장 중요한 근간은 아마도 집 앞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와 민족의 성산 마니산이 아닐까 생각된다. 푸른 바다를 보며 유년의 감수성을 담뿍 키워가던 그에게 마니산의 예사롭지 않은 서기(瑞氣)와 풍광은 만만찮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의 작품 중 60%를 상회하는 작품들은 산과 강, 그리고 바다가 소재다. 그는 인천문화재단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다음에 너의 조국 산과 강과 바다를 많이 그려라. 음악으로 그리든, 그려라. 아마도 그렇게 신의 섭리가 저의 생명을 위해서 그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혼자 하게 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조국의 산하에 대한 이러한 태생적인 관심과 자연스런 애정은 조국이 외세에 강점되어 모든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상황에서 어쩌면 뜨거운 소년의 가슴을 격동케 한 강한 동인(動因)이자 음악의 모태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어 곧바로 만난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게 되면서 그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은 더욱 조국의 산하와 통일, 그리고 나라사랑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갔을 것이다.

  

특히 시인 조병화와의 만남은 작곡가 최영섭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두 사람 모두 기차 통학을 했고 기차 안에서 조용히 작품과 관련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를 좋아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서로 조우하게 된다. 조병화는 이후 자신의 습작을 최영섭에게 보여주며 느낌을 묻기도 하는데, 그때 만나서 건네받은 시를 작품으로 옮긴 것이 바로 <추억>이다. 6.25 전의 일이었다. 시 또한 음악성을 매우 중시하는 언어예술이다. 아마도 인천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시와 음악이라는 예술적 공통점이 어우러져 두 예술가의 만남에 시너지를 발생시켰고 이후 아름다운 만남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병화 시인의 호가 편운(片雲, 조각구름)’이고 최영섭 작곡가의 호는 운산(雲山)’이다. 두 사람의 호에 공통적으로 구름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최영섭이 조병화에게 받은 영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2009년 최영섭은 30년 만에 창작 오페라 '운림(雲林)'**을 완성했다. <운림>은 악보만 해도 476쪽에 달하고 합창단과 사물놀이패를 포함하면 출연자가 150, 공연시간도 2시간 반이나 되는 대작이다. 팔순의 노 대가(大家)가 이룬 대단한 성취이자 음악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년 1212, 인천광역시 서구 청라에 위치한 엘림아트센터에서 '오마주 투 코리아'라는 주제로 최영섭 작곡가의 구순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쟁쟁한 후배 음악가들이 헌정한 이날 행사의 압권은 당연하게도 출연자들과 객석이 하나가 되어 부른 그리운 금강산합창이었다. 그가 구름 산 너머로 그리워 한 금강산의 풍광이 인천 시민들의 눈과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망백(望百)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열정 가득한 음악가이다. 세월은 그에게서 빠른 발걸음과 비상한 기억력, 밝은 시력을 조금씩 빼앗아갔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가슴 속, 음악과 인천, 그리고 민족에 대한 사랑은 결코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 한 명민한 예술가의 예술혼이란 결코 세월에 의해 잠식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더. 그는 단지 인천의 예술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가 남긴 소중한 예술의 자취들을 보전(保全)하여 다음 세대에 오롯이 넘겨주는 것은 인천을 사랑하고 예술을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소중한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문득 인천문화예술회관 광장에 세워진 그리운 금강산노래비를 찾아보고 싶다. 그 앞에서 머잖아 실현될 최영섭의 꿈이자 우리 모두의 소망인 통일을 생각하며 <그리운 금강산>을 나지막이 읊조려 보고 싶은 것이다.

 

* 운산(雲山)은 최영섭 선생의 호다.

** 영어로는 <sound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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