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시집『너무 늦은 연서』(실천문학사, 2017)에 대한 리뷰 본문
사랑, 옆에 있어 주고 조용히 바라봐 주는
―문계봉, 『너무 늦은 연서』(실천문학사, 2017)
이성진(시인, 실천문학 편집위원)
정말 너무 늦었다. 1995년 실천문학 2회 신인상 등단 이후, 스무여 해를 지나 문계봉 시인이 보내 온 연서가 너무 늦었지만 다행히 우리 앞에 도착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지난 엄혹한 시대를 제대로 관통해 온 시인의 68편의 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그림자가 말해질 수 있다면 이번 시집의 시들은 그림자들의 후일담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후일담들이 말하는 방식은 그간 후일담 문학이 보여준 다소 격앙된 마음의 방식이 아니라 자못 담백하다. 그래서 그 담백함의 방식이 낯설기도 하다. 그런데 이 툭툭 내뱉는 듯한 발화의 방식이 ‘사실’이라는 가장 정확한 발화 방식이어서 그 동안 휘황찬란한 수사학 학교였던 근래의 시집들 뒤에 가려진,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진정성의 귀환 혹은 귀함으로 읽히기도 한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이 구획의 경계는 시 내용의 스펙트럼이 보여주는 것처럼 명료하다.
1부에서는 서늘한 피 냄새 나던 시절을 통과해 온 살아남은 어른의 목소리로 읽힌다. “한때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그”들은 “더 이상 진보적 잡지를 읽지 않”고 “문건을 쓰고 구호를 외치던 손으로” “세차를 하고 우유 배달하고 운전을 하지만 생활은 그에게 낯선 전선이”기만 하다. 이 흔들리는 어른은 담담히 사실이라는 감정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 때의 감정은 말해지지 않고, 다만 완전히 시로 보이는 것으로 완성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바로 적확하게 와닿는,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시의 준정들이다. 더불어 시인은 어른들의 비겁함에 대해 “너희는 용서하지” 말라며, 어떤 ‘세월’로 가 버린 아이들에게 자책할 수밖에 없는 어른의 안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살아남은’ 어른은 후일담과 동시대의 아픔을 공명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작가 자신이 가장 열렬했을 때인 과거의 시대감각만 고집하기보다는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미래와의 공감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반가움으로 비쳐질 수 있는 ‘진짜’ 어름의 귀환으로 보이기도 한다.
2부에서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파노라마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는 “많은 빛들이 살”았다고 말하면서 그를 통과한 빛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하나같이 고마워하고 있다. 가장 찬란하면서도, 그 반대편에서 보면 그 찬란한 빛의 정체는 어쩌면 공포의 시대를 뚫고 폭발하던 에너지를 지켜보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을 텐데, 그 폭발의 순간에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 준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후일담이라면 으레 작가 중심의 영웅담이라는 방식과 견주어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이 시집의 정서는 주변 지인들에 대한 고마움의 정서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은 “빛”이었다가 “빚”이 된다. 이때 “빚”은 평생을 걸쳐 시인이 주변의 지인과 함께 갚아나가는 “빚”이 되기에 어쩌면 읽는 독자들은 이 “빚”을 다시 “빛”으로 치환해서 가슴에 담는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시인은 시집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도 표현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힘내요 태인 씨”라는 연작시를 통해서 하나의 독립 존재로 상정하고 3부 전체를 어머니 “태인 씨”에게 헌정하고 있다. 수돗물을 꼭꼭 잠글 힘이 없는 어머니 “태인 씨”에게 시간조차 잡을 수 없냐고 아쉬워하고, 또 새벽에 화장실에 가는 어머니 “태인 씨”가 신기 편하게 슬리퍼를 돌려놓는 시인의 사모곡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작가가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추측건대 “외로움도 그리움도 소리로 듣는, 외로워서 결코 외롭지 않은 태인 씨”의 마음을 시인이 그대로 “일러”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대지와 같은 넓은 품,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존재를 잠시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당연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마주한 이 감정에 새삼 노스텔지어마저 느끼게 된다.
마지막 4부에서는 운유당 서신이라는 연작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이 이루고자 하는 사랑은 옆에 있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랑이다. 어쩌면 ‘옆에 있고 걱정해’ 준다는 수식 자체가 사랑의 맹목적인 정의이기에 동어반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 우리가 생각했던, 하지만 잊고 있던 사실이기에 이 시집은 어쩌명 사랑의 고고학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시인은 “낯선 곳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거나 “당신과 조용히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응당 나누어야 하는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이런 마음을 얼마나 가지고 살아가는지 한번쯤은 곱씹어 볼만 하다. 곱씹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줄 뿐이다. 이 시집의 감동은 그런 지점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자기는 “늘 여기 있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사랑이고,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개인의 순간적인 번민으로 인해 항상 놓치고 있는 사랑의 본질들이 아니었을까.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들, 즉 “하찮은 대화”를 “마음으로 받아 줄 상대가 된 거”라도 “나는 그것이 결코 하찮아 보이지 않았”다고 시인은 이야기 한다. 이것은 더 이상 하찮은 대화가 될 수 없다. 그 대화 안에는 사랑이 있고, 시인은 그것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소해 보이지만, 그 소소함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문계봉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우리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잃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감정을 알려주기 위해 찾아온, 한파를 뚫고 온 하나의 긴급 타전 같았다. 시인의 한결같은 마음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계절 문계봉 시인의 연서에 각자의 마음을 담아 답장을 해 보는 것도 한 시절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계간 『실천문학』 2018년 봄호.(통권127호) 251쪽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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