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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일찍 일어났으나 말썽 부리는 세탁기 점검하느라 오전을 다 날리고, 점심시간쯤에 느지막이 출근하다가 단골 미용실 앞에서 계획을 바꿨다. 전형적인 MBTI-P형 속성이다. 손님이 한 명도 없으니 기다릴 것도 없다고 생각해 무작정 미용실에 들어가 파마(펌)를 새로 했다. 머리를 말고 파마약을 바른 후, 파마가 굳기를 기다리는 동안, 남성 손님 두 명과 여성 손님 한 명이 다녀갔다. 한 시간 후 머리를 감고 보니 지난번 보다 웨이브가 심했지만,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파마하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으므로 출근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와 청소하고 빨래했다. 세탁기는 여전히 툴툴거렸다. 저녁에는 누나가 생닭을 사 와 닭백숙을 끓여주었다. 닭백숙은 다른 양념 필요 없고 오로지 마늘만 넣고 끓여도 맛이 있다. 몸에도 좋..

타성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힘센 타성을 이겨보려고, 결심한 걸 절대 잊지 말자는 결심까지 한 적 있다. 그러나 자주 진다. 오늘도 결심과는 달리 점심에는 라면, 저녁에는 냉면을 먹었다. 술 마신 다음날의 루틴이지만, 그만큼 몸에 밴 습관(타성)은 벗어나기 힘들다. 나쁜 걸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건 의지가 약해서겠지. 근데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다고 타성과의 싸움에서 나의 의지가 늘 패배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겨하지' 하고 결심하는 거지, 맨날 패배하면 무슨 맛에 결심하겠나. 11시쯤 유 박사가 전화해 "형, 해장해야지" 했다. 낮술 마시자는 것이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는 곁을 주면 너무 자주 연락한다. 외롭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부담스럽다. 그나마 오늘은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다 전..

컨디션이 안 좋아 쉬려다가 점심시간쯤에 출근했다. 오전에는 보운 형이 부탁한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느라 시간을 보냈고, 11시쯤에는 작가회의 사무처장인 옥 아무개 시인의 전화를 받고 그녀의 긴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하소연의 핵심은 현재 지회장을 맡고 있는 김 모 시인의 고압적인 태도와 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조직이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다른 문학단체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 조직을 깎아내리며 험담하기도 하고, 회원의 동의나 이사회의 판단이 필요한 중요한 안건조차 자기 맘대로 결정해 버리는 전횡을 일삼고 있다고 했다. 사실 지회장의 독불장군식 사업작풍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여러 채널을 통해 들어왔던 터라서 새로울 건 없었는데, 다만 이사 중 상당수가 그의 행태에 반기를 ..

‘게드 전기 : 어스시의 전설’을 다시 봤다.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의 작품인데, 개봉 당시에 이미 졸작으로 소문난 작품이라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감상했던 기억이 있다. 오늘 선입관 접어두고 다시 봤는데, 오히려 왜 졸작인지 더욱 명확해졌다. 같은 지브리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을 텐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연출력의) 갭이 왜 이리 큰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예술적 감수성은 쉽게 유전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튼 원작자인 어슐러 K. 르 괸 여사의 평이나 아버지인 하야오조차 야박하게 평가한 걸 보면 확실히 범작이거나 졸작인 게 분명하다. 일단 주인공의 행동은 물론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개연성이 없거나 회수되지 않는 떡밥이 많았다는 말..

뜬금없이 뭔가가 무척 당기는 날, 그런 날이 있다. 하지만 혼자 살다 보니 주문해서 먹기가 쉽지 않다. 물론 최근에는 쿠팡이츠나 요기요 등 전문 배달 업체가 생겨나면서 한 그릇(1인분)도 배달해 주는 식당이 생겼지만, 여전히 최소 주문 금액이 정해져 있거나 한 그릇은 배달하지 않는 곳이 더 많아 불편하다. 그래서 주문할 때는 매번 2인분을 주문한다. 각설하고, 오늘은 왜 그런지 모르게 오후가 되면서 족발이 무척 당겼다. 만수역 앞 ‘장수족발’은 내가 먹어본 족발 중 가장 맛있는 집이다. 문제는 앞다리를 먹고 싶은데, 앞다리는 대(大)자로만 팔아서 값이 제일 비싸고, 값도 값이려니와 나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또 족발은 식당에서 사 왔을 때 바로 먹어야 맛있지, 먹다 남겨두었다가 다시 먹으면 그..

자신을 사랑하는 일만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까.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일수록 자신을 망가뜨리기 쉽다. 그 너그러움이 불의를 용인하고, 자기 몫이 아닌 것을 탐하게 하며, 나중에는 그 모든 잘못을 합리화하게 한다. 자신을 진정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래서 무척 진부한 말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옛 성인들도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며 ‘신독(愼獨)’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대개 타인이 보는 앞에서는 품격과 예의, 도리와 삼감의 모습을 갖추려고 쉽게 노력한다. 그건 최소한의 당위로 시작해 입소문을 거치고 평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에게는 위장된 품행이 카멜레온의 변색만큼이나 수월하다. 또 수월한 만큼 위..

여느 날보다 일찍 일어났다. 오랜만에 볕도 공기도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희한하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도 맑다. 아침 운동 끝내고, 빨래를 한 후 오랜만에 채소 가게에 들렀다. 오이는 천 원에 두 개로 여전히 비쌌지만, 다른 채소들은 지난주와 값이 같았다. 진도 대파는 한 단에 천 원이라 얼른 구매했다. 두부 3모와 달걀 한 판, 아삭 고추와 청양고추를 샀고, 순두부 2 봉지, 칼국수 면발 2개, 숙주나물과 깻잎을 샀다. 양배추도 사려고 했으나 크기가 너무 커서 나중에 사기로 했다. 큰 거 한 통이면 오래 먹을 수 있긴 하지만 보관하기가 어렵다. 유튜브에서 본 양배추 보관법을 따라 해 봤으나 다 먹기까지 기간이 길다 보니 색이 변하고 신선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소분(小分)해 놓..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고 해도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캬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람짐이 있을 뿐이다.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 한 이루려 하지 말며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내 몸을 분질러다오...

이소영 개인전 ‘無를 감각하다’(SENSING OUTOPOS)■■작가가 전시주제로 밝힌 ‘outopos’(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는 단지 존재의 결여가 아니다. 작가는 이것을 오히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기에, 모든 곳으로 확장되어 흘러갈 가능성을 지닌 열린 영역으로 환치한다. 완벽한 고요 속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적막함은 결코 비어있지 않은 것이다.❚ 부재의 공간이 낯설지만 익숙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조용히 두드리며, 존재의 표면 아래서 은밀하게 뛰고 있는 가능성의 맥박이다.❚ 작가는 “존재의 단단한 실체로부터 벗어난 유연한 비(非) 장소, 뚜렷한 형태도, 명확한 경계도 없이 끝없이 퍼져가는 이 가능성이 새로운 인식과 감각의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라고 설명한다.❚ 실재와 환영..

오전 9시쯤의 내 생각입니다. 아마 두서없을 겁니다. 자, 지금부터 나는 추억여행을 할 겁니다. 당연히 여행은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겠지요. 일단 마음의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로 갈까요? 첫사랑 영주가 있던 시간으로 갈까요? 그런데 잠깐, 나는 분명 사랑을 해봤는데, 왜 사랑의 감정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면 머리가 하얘지는 걸까요? 사랑의 감정은 나한테만 이렇게 휘발성 있는 걸까요? 영주는 나에게 자주 숙제를 부탁했고, 나는 내 숙제보다 그녀의 숙제에 더 정성을 기울였어요. 그녀가 “고마워”하며 살짝 웃으면 세상의 색과 공기가 달라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첫 입맞춤은 그녀와 한 게 아니었지요. 사랑은 참 안아보기 쉽지 않은 극성스러운 강아지 같아요. 나의 타임머신은 영주가 나의 첫사랑이었던 때로 가진 않을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