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느슨해진 일상 (12-06-수, 비 내린 후 갬) 본문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한낮에는 제법 거센 비가 내렸다. 날은 봄날처럼 포근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이런 날은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할 수밖에 없는 날이다. 날씨 탓이다. 낮잠을 자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오늘은 도시 가스 점검 기사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라서 낮잠도 잘 수가 없었다.
오후가 되면서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오래 내릴 비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기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상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더덕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자는 전화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5시 30분, 구월동 이삭 생선구이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이번에는 수홍 형이 전화를 걸어와 “어디야? 멀리 있어? 소주 한잔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벗들이 찾아주는 건 고마운 일이나 어느 정도 자리 잡았던 나의 건강 루틴이 닥치는 대로 살아갈 때로 회귀하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단호하게 거절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쪽에서 오히려 반색을 하며 좋아했던 적도 많았다. 울고 싶은 사람 뺨때려준 것 같은, 뭐 그런 상황이랄까. 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수홍 형 이야기를 한 후 같이 보기로 했다. 거기에 은준도 합류했다.
오늘도 은준과 상훈의 대화는 아슬아슬했다. 그러면서도 서로 찾는 걸 보면 참 희한한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음식은 괜찮았다. 손님도 많았고 주인의 인심도 좋았다. 까다로운 상훈이가 좋아할 만했다. 다만 골목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이 좀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술값 9만 3천 원을 계산했다. 요즘 지출이 많다. 하긴 담배를 끊고 술도 예전보다 덜 마시니 전체 지출 규모는 확실히 6월 이전보다 줄기는 했다. 상훈이 계산대까지 따라오며 “왜 형이 내? 내가 불렀는데... 그럼 나눠서 내요” 했지만 적극적으로 만류하진 않았다. “생각해 봐. 그래도 직장 다니는 사람이 나밖에 더 있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그때는 네가 사”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비는 내리지 않았다.
구월동 수협사거리 쪽으로 걸어와서 프라이드치킨을 먹었다. 상훈이는 ‘삼겹살을 먹고 와서 뭔 닭이에요“ 했지만, 수홍 형이 강력하게 먹고 싶다고 우겼다. 날개와 다리만 시켜서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생각과는 달리 술술 잘만 들어갔다. 치킨 값은 수홍 형이 계산했다. 그곳을 나와 수홍 형은 음악이나 듣겠다며 먼저 비틀스로 향했고 나와 은준, 상훈은 근처 이자카야 ’류‘로 자리를 옮겨 3차로 맥주를 마셨다. 고기 안주로 술을 마셔서 그런가 전혀 취하지를 않았다.
마지막으로 비틀스에 들렸더니 수홍 형은 진오와 앉아서 술 마시고 있었다. 대충 신청곡 두어 곡을 들은 후 수홍 형과 진오를 남겨둔 채 3명은 밖으로 나왔다. 겨울밤이 봄밤처럼 포근했다. 적어도 나에게도 그렇게 느껴졌다. 상훈이는 집까지 걸어가겠다면 순복음교회 쪽으로 가고 택시를 잡겠다는 은준이를 설득해 전철을 같이 탔다. 그는 주안역방향 나는 만수역방향, 시청역에서 헤어졌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숱하게 수다도 떨다가 무탈하게 귀가했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잦은 부고 (12-08-금, 맑음) (0) | 2023.12.08 |
---|---|
봄처럼 포근한 날, 치과 진료 (12-07-목, 맑음) (0) | 2023.12.07 |
땅콩껍질 속 같은 나의 왕국 ( 12-05-화, 맑음) (1) | 2023.12.05 |
오래된 일기를 스캔하다 (12-04-월, 맑음) (0) | 2023.12.04 |
다시 찾아온 불면 (12-03-일, 맑음) (1) | 2023.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