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땅콩껍질 속 같은 나의 왕국 ( 12-05-화, 맑음) 본문
거칠게 말하면, 나의 집에는 나의 왕국이 있다. 비록 좁고 부서지기 쉬운 땅콩껍질 같은 집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의 왕국에서 무척 자유롭다. 비교적 친절하고 깔끔한 통치자인 나는 왕국의 '껍질' 밖으로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의 몸은 점점 줄어들어 요즘은 좁고 작은 나의 왕국에 적합한 크기가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쉽게 나의 몸을 좁고 작은 공간에 맞출 수 있다.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껍질 안의 세계, 그러니까 나의 왕국은 어찌나 평화롭고 안온한지 시간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럴 때는 마치 내가 공간에 몸집을 맞춘 게 아니라 공간이 나의 몸, 나의 피부와 하나 되기 위해 점점 나를 향해 압축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심지어 나의 왕국은 나의 가장 내밀하고 부끄러운 비밀을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왕국에는 나의 몸집과 연동해 부피를 증감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외에는 그 어떤 신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둘 것은 왕국과 '공간'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왕국을 포함하는 것이지 왕국이 공간(집)을 장악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왕국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신민도 존하지 않지만 나는 이곳에서 외롭지 않다"라고. 사실, 다른 왕국에 관한 정보를 담은 수많은 책과 세상의 소식을 알려주는 랜선이 있으니 외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다만, 공간 중에서 왕국에 포섭되지 않은 곳인 엄마의 방만 나를 두렵게 할 뿐이다. 그 앞을 지나거나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속절없이 나의 정서를 무장해제시키는 극강의 스산함과 쓸쓸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아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왕국을 옮길 때까지 엄마의 방은 나의 왕국에 복속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아직 시간은 나를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
H로부터 "조만간 뵈어요. 선배"라는 문자를 받았다. 최근까지 올 한 해 진행했던 사업 보고와 새해에 펼칠 사업 계획과 관련해 구 의회와 의원들을 상대하느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맛있는 거 먹자.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잘 거야."라는 답장을 보냈다. "*^^*"라는 짧은 대답이 다시 돌아왔다.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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