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가끔 오늘 같은 날도 있어야지 (11-26-일, 흐림) 본문
과일과 채소로 아침을 먹고 방 안 정리한 후 컴퓨터를 켰더니 고등학교 동창 산우회 톡방에 '소래산 번개 산행 공지'가 올라와 있더라고. 게다가 오전 11시쯤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예보까지 있었어. 대공원 호숫가나 소래산 정상에서 눈을 만난다면 그것만큼 멋진 일도 없을 거 같아서 오랜만에 등산복 찾아 입고 인천대공원역 2번 출구로 나갔지 뭐야. 그런데 약속 시간 10시가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거였어. 5분쯤 기다리다 번개를 제안한 친구 이찬만에게 전화했더니 "친구야, 지금 대공원이야? 오늘 애들이 무반응이라서 취소했어"라는 거였다. 이런, 젠장! 정말 가는 날이 장날이군.
이후에 호형과 노일에게 연이어 전화가 왔다. "친구야 미안해. 오늘 다른 일정이 있어서....." 이건 호형이었고, "네가 올 줄 알았으면 나라도 나가는 건데. 보고 싶었거든" 이건 노일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괜찮아. 사실 나는 주말마다 혼자 공원에 산책하러 와. 오늘은 번개 모임이 있다고 해서 평소보다 조금 늦게 와봤던 건데, 할 수 없지. 여느 때처럼 혼자 공원 둘러보고 가야지 뭐." 했다. 사실 이 얘기는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주말에 혼자 산책하러 대공원을 자주 찾았다. 최근에는 뜸했지만, 아무튼.
할 수 없이 혼자서 30분쯤 산책하다가 채소를 사기 위해 동네로 돌아왔다. 가게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무엇보다 브로콜리가 너무 좋아 보였다. 가격도 괜찮았다. 한 송이에 천 원, 하지만 다른 것도 사야 해서 세 송이만 샀다. 또 양배추 한 포기를 2천 원에 샀고, 피망도 3천 원어치 샀다. 채소 가게였지만 계란도 있었다. 30개 한 판에 6천 원, 단골 마트보다 8백 원이 저렴했다. 당연히 구매했다.
집에 와서 채소 손질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브로콜리는 소금과 식초 물에 30분 담갔다가 먹기 좋게 손질한 후 찜기에 3분쯤 쪄서 소분해 놓았다. 양배추는 채를 썰어 일부는 냉동실에, 일부는 냉장실에 넣어두었다. 점심 먹고 치울 때까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잔뜩 내려앉아 있어 금방이라도 뭔가가 쏟아져내릴 것만 같았다. 날이 흐리니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참다참다 굴보쌈에 소주 한잔하고 싶어 혁재에게 전화했더니 엄마가 감기에 걸려 간병하고 있다고 했다. 걱정과 격려의 마음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모든 일이 자꾸만 어긋난다. '이건 뭐지?'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왜냐하면 친구들과 만났어도 술 마셨을 것이고 혁재에게는 애초부터 술 마시자 전화한 것 아닌가. 그런데 둘 다 파투났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으라는 하늘에 계신 엄마의 뜻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일이 어긋날 때는 다 모종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문득 여우와 신포도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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