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나랑 혁재랑 병균이랑 술 마시다 (05-20-토, 맑음) 본문
오늘은 내쪽에서 후배들에게 전화했다. 약간의 의무감이 없었던 게 아니지만, 아니 그게 컸지만, 나 역시 후배들에게 할 말이 있었다. 나의 예술에 관하여, 나의 시에 관하여, 나의 사랑과 투쟁과 살아남음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낮술을 택했고, 그들이 찾아오기 쉬운 장소로 내가 기꺼이 갔다. 신기시장 이쁜네에서 2시 30분에 혁재를 만났고, 3시에 병균이가 합류했다. 혁재는 토끼풀꽃 세 송이를 내게 주었다. 나는 그중 하나로 혁재에게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도미 회와 멍게를 주문했는데, 회를 좋아하던 병균이의 식성이 달라져서 비싼 안주 대부분이 그대로 남았다. 혁재는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고, 그리하여 취해 있었으며, 전날 갈매기 옆 '투다리'에서 1인 손님(혁재가 혼자 술집을 찾았다가 거부당했다는데)을 거부하던 종업원들과 부딪쳤던 일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했다. 병균이와 내가 듣기로는 혁재의 행동이 진상짓(막걸리 3병을 주문한 후 2병을 꽃밭에 버리고, 안주 역시 하수구에 버리다가 말리는 종업원과 실랑이하고, 그 과정에서 접시를 깨먹고.... 경찰까지 왔었다고 한다)이었는데, 혁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병균이에게 "혁재가 요즘 화가 많아졌군" 말했더니 병균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혁재에게 "혁재야, 홧술 마시지 말아라. 화가 너의 영혼을 갉아먹을까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혁재는 "홧술 안 마셔요. 저는 슬픔으로 술 마셔요." 했다. 깡마른 얼굴과 거칠어진 얼굴이 안쓰러웠다.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연신 투다리를 성토하는 그가 무척이나 낯설어 보였다. ❚병균이는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워졌다. 그것도 나는 슬펐다. 오랫동안 힘든 상황에서 그를 견디게 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니 뻔한 일이지만 까칠한 성정과 자존심이었는데, '까칠함'이 없어지니 싱거워졌다. 좋기도 하면서 뭔가 그만의 색깔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묘했다.❚이쁜네를 나와서 갤러리 듬에 들러 전시 구경을 하고, 혁재가 안내하는 집으로 2차를 갔다. 2차에선 술 마시지 않고 잔치국수를 먹었다. 돌아오는 33번 버스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 정도 술이 깼다. 좀 더 생각이 명증해지면 오늘 나눈 이야기를 복기해 볼 생각이다.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나갔다 왔는데도 전혀 썰렁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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