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가끔 우연의 옷을 입은 운명 같은 본문
이를테면, 예상했던 건 아니고, 오히려 예상이 빗나가서 다행이었던, 그런 시간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근무 없는 날에는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술도 삼가는 중인데, 오늘은 아침부터 2년 전에 작고한 선배의 유고집 발간을 위해 교정 원고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피로했고, 원본을 타자로 친 한글 문서가 너무 부실하고 오타도 많아 짜증도 나서 누군가 불러주면 기꺼이 나가겠노라 툴툴대며 모니터를 끄고 막 일어나려던 차에 우 선배로부터 문자가 온 거야.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주는 격이지. 우 선배의 짤막한 문자, “오늘 저녁 일정 있나?”였지. 일정 없는 사람도 있나. 저녁도 일정이고, 수면도 일정이고, 목욕과 세수도 일정인데, 물론 선배는 약속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은 것일 테지만, 우 선배, 나와 관련된 혹은 나에게 신의를 잃은 몇 번의 ‘전과’가 있다. 약속을 정하고 나가려고 할 때쯤 전화를 걸어 “이걸 어떡하나.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겼어.”라든가 “오랜만에 S로부터 전화가 왔어. 회사 앞에 와 있다는 거야. 어떡하지. 같이 볼까? 불편하지? 그럼 이해해 줘. 사랑해.”와 같이 뒤통수를 치는 전과 말이다. 일일이 세진 않았지만, 아마 서너 번은 될 거야.
오늘도 그런 식이었지. 절주를 진행하고 있는 나를, 보고 싶다며 불러내 놓고 약속 시간 10여 분 전에 “먼저 마시고 있어. 좀 늦어.”라고 문자를 보내 살짝 나의 반응에 대한 간을 본 거지. 하하하. 귀여운 사람 같으니라고. 뭔가 싸한 느낌이 들어 “다른 약속 잡혔어요?” 하고 문자로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다가 약속 시간 20여 분 지나서 와이셔츠 차림으로 헐레벌떡 들어와 “회사 사회부장인 후배가 갑자기 강화로 발령이 났다는 거야. 너무 우울해하기에 위로해 줘야 할 거 같아서. 계봉 아우는 비교적 자주 보잖아. 미안해.”라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발언을 한없이 미안한 표정을 하고 한 거지. 그러면서 “그래도 막걸리 두 잔은 마시고 갈게. 술값도 5만 원, 내가 미리 계산하고 갈게.” 하는 것이었다. 술값을 낸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함께 마신 술도 아닌데 돈을 내는 건 아니다 싶어서 “됐소. 한두 번도 아니고 원.”하고 웃었더니 “미안해. 이해해 줘.”하며 정말 막걸리 딱 두 잔을 마시고 일어났다. 갈매기가 아니었으면 화낼 법도 했는데, 아니, 당연히 화내야 하는 거였지만, 다행히 갈매기는 약속하지 않고도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니까 이번에도 용서하기로 했다.
덕분에 조구 형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좋은 일이지. 혁재도 보고 연극쟁이 이재상도 보고, 우 선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뜻밖의 선물 같은 만남이었지. 무엇보다도 취하지 않는 혁재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고. 오랜만에 막걸리를 두어 병 먹었더니 알딸딸한 낯익은 느낌이 찾아오더군. 예상했던 건 아니지만, 예상이 빗나가서 오히려 좋았던 날이었어.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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