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추억에 젖다 본문
오래전 대학생 시절, 분위기가 오늘 날씨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후배 K. 목소리마저 저음이라서 그 어떤 노래를 불러도 후배의 노래는 하나같이 애조띤 노래처럼 들렸다. 작정하고 슬픈 노래를 부를 때면 그 처연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좀처럼 흥분하지 않던 진중한 후배였다. 그녀는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학교 앞 술집에서 내게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으나 나는 접수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따로 맘에 두고 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곤혹스러움 때문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변하던 그녀의 표정, 잊을 수가 없다. 잠깐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탁자를 내려보다 뭔가 결심을 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피식 웃던 그 모습을……. 이후 문학회 후배였던 그녀는 동아리방에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우연히 동선이 어긋난 건지 일부러 나를 피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한동안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선배의 결혼식장에선가 잠깐 만났던 것 같다.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이내 유학을 떠났고, 본래 이 사람 저 사람과 광범위한 교류를 하던 성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 소식은 술판에서 동료들 사이에서 잠깐 언급되었을 뿐 이내 잊히곤 했다. 30여 년 만에 그녀의 소식을 다시 접한 곳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였다. 포스팅한 글들은 대부분 기도문의 형식을 띤 신앙적인 글들이었고 간간이 직접 찍은 사진과 직접 그린 그림들이었다. 기도문을 제외하면 모든 글과 이미지들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함께 아는 친구 목록을 보니 다른 문학회 동료들과는 꽤 오래전부터 소식을 나눠온 모양이었다. 특히 미국 쪽으로 이민 간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현지에서 만나 교류를 나누기도 한 것 같았다. 나와도 ‘친구’ 사이가 되었지만, 그녀도 나도 페북에 자주 글을 올리는 편이 아니라서 (특히 그녀가) 소식은 잘 모른다. 일부러 그녀의 계정을 검색해 들어가 봐도 오래전 올린 글들만 있을 뿐이다.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녀와 글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다소 불편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릴 때 오고 가다 어긋난 마음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성격 탓도 있겠지만…… 문득 추억 돋는 금요일 오후다. 날씨도 우중충하고, 갈매기에 일찍 들러 낮술이나 하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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