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쓸쓸함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 본문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엄마의 마지막이 생각이 난다. 정말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엄마는 주무시듯 편안하게 가신 게 맞은 걸까. 만약 음식을 못 드시고 물만 드셔도 게워내시기 시작했을 때 서둘러 응급실에 모시고 갔으면 혹시 살 수 있지 않으셨을까. 현대의학은 어떤 형태로든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두어 달 전 응급실에 갔다가 입원하시고, 새벽에 당장 병원에서 퇴원시켜달라고 가족들에게 전화했을 때 황망한 마음으로 이튿날 아침 바로 모시고 나오긴 했지만, 동생과 나는 이야기를 했었다. 엄마의 상태를 볼 때 이런 류의 응급실행은 앞으로 잦아질 것이고 이전처럼 엄마 몸이 복원되지 못할 것 같다고. 그래서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다.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지는 엄마를 보면서 솔직히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낙천적이고 깔끔하신 엄마는 스스로 아픈 티를 내는 법이 없어서 눈에 띄는 상태 변화가 없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곤 했다. 늘 살얼음판 걷는 심정이긴 했지만. 사후약방문일 테지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교회에도 나가고 산책도 하면서 그런대로 몸도 마음도 평상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응급실에 들러 조치했다면 5년은 더 사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병원에 가자는 말은 엄마에게 자주 드리긴 했다. 썰렁한 병실에서 보호자도 없이 한밤을 보내는 것에 두려움 때문에 섬망 증상까지 보였던 엄마는 병원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크게 도리질하시면서 거부하셨다. 몇 년 전 중환자실에 올라가 일주일간 의식이 없으셨을 때의 트라우마도 엄마의 병원행을 꺼리게 하는 요인이었다. 엄마는 그때 환각을 보셨던 것 같다. 매형이 자신을 이상한 곳에 버리고 갔다면 퇴원하시고도 얼마간은 매형의 처사를 고깝게 생각하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엄마, 그게 아니라 엄마가 처음 입원하셨던 곳은 늘 가시던 길병원 응급실이었고 거기서 혼자 숨을 쉴 수 없어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거예요.”라고 말을 했지만, 엄마는 내심 그 말조차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그 이후 엄마에게 응급실과 입원실은 절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각인되었다.
내가 바로 옆방에서 문을 연 채로 누워 있었고 새벽에 거실로 나가 만난 정갈하신 마지막 모습을 볼 때 힘겹게 운명하신 게 아니라는 심증은 있지만, 어쨌든 나는 엄마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고 그것이 마음을 괴롭힌다. 혹시 나를 애타게 불렀는데 피곤한 나머지 내가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며칠 전부터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 엄마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응급실에 모시고 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 그리고 엄마와 많은 대화를 해드리지 못하고 내 일에만 집중한 것, 컨디션이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술자리를 갖고 10시나 되어서야 귀가했던 일 등등 자식으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일들만 자꾸 떠올라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다. 내가 술자리로 늦게 들어온 날, 늦은 밤까지 나를 기다리다 혼자 방으로 가시다가 문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신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이후 어깨부터 팔뚝, 허리, 다리, 종아리, 복숭아뼈까지 전신이 욱신거리신다며 큰 고통을 호소하셨다. 그것도 엄마의 체력을 급격하게 떨어지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엄마 가신 후에는 어쩌면 그리도 못난 아들이었을까 하는 자괴감만 몰려온다. 좀 더 엄마와의 살뜰한 시간을 가졌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은 당연하고, 가끔 (건강과 관련하여 노인들은 스스로 진단하는 경향이 있어서) 내 의견을 듣지 않아 짜증 낸 걸 생각하면 마음이 섬찟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나보고 효자라고 칭찬을 했지만, 나는 의무감을 조금 웃도는 정도로만 자식의 본분을 감당했을 뿐 결코 효자가 아니다. 설혹 내가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 엄마가 많이 웃었던 적이 있었다고 치자. 실제로 엄마는 나와 이야기하며 큰소리로 웃었던 적이 많긴 하다. 하지만 못한 것이 쌀 한 말이라면 잘한 것은 밥 한 공기 분량이나 될까. 그나마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나와 대화를 나눈 서너 개의 녹음파일을 지우지 않고 보관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매번 엄마의 입장이 되어 못난 자식으로서의 행동을 반성하기도 하고, 내 편에서 그래도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하며 합리화도 해보지만, 마지막에 밀려오는 생각은 결국 쓸쓸함이다. 잘 해드렸든지 못 해드렸든지 부모를 잃은 자식에게 회한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과 회한은 부끄러움을 아는 자식이라면 평생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엄마를 평생 힘들게 했으니 이제 내가 어느 정도 힘들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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