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비 내리는 날, '극장 앞'을 가다 본문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다. 새로운 직장은 일도 환경도 낯선 게 분명하지만, 아니 낯설어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현재 나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다. 오히려 너무 편하고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변화 자체를 즐기는 내 성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같은 시간에 일제히 퇴근하는 직장의 시간이 너무도 재밌다. 조용하던 교육청 앞뜰과 주차장이 6시만 되면 한꺼번에 몰려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그때 나는 문득 그 일군의 무리와 한배를 타고 있다는 소속감을 느끼게 되니 희한한 일이다. 교육청 업무도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부분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정책특보의 임무 역시 개점휴업 상태다. 교육감이 매일 코로나 상황을 점검하랴 비대면 수업에 대해 고민하랴 정신이 없는데, 무슨 문화예술 교육과 정책을 고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인천 교육 전반을 공부하고 있다. 때때로 SNS도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코로나가 망가뜨린 시간을 견디는 중이다. 모두가 분주한데 나 혼자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싶게 여유롭다.
9시가 다 되어 혁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밀히 말하면 혁재의 전화로 (그의 전처인) 선아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지만, 아무튼 “잘 지내요? 어디세요? 지금 여기에 올 수 있어요? 혁재 형이랑 자운 선생님이랑 함께 있어요.”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잠시 망설였다. 밤도 늦었고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간 취한 듯한 자운 선생이 수화기를 빼앗아 “오세요. 오랜만에 보고 싶네요. 오실 때 맥주 4캔만 사 오세요. 그나저나 오실 수는 있어요?”라고 말을 했을 때는 이미 마음은 신포동 혁재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비는 생각보다 거세게 내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가 발령 중이라 모든 식당과 술집은 9시까지만 영업이 허락됐다.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에 서 있으니 9시가 되어 술집에서 쫓겨난 반쯤 취한 손님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들은 하나 같이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상태로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다는 표정들이었다. 코로나가 만든 낯선 풍경이었다.
정확하게 30분 후, 애관극장 앞에 도착했다. 근처에 가게가 없어서 기독교병원 근처 편의점까지 빗속을 걸어가 천진(칭따오) 맥주 4캔을 사 들고 자운 선생의 카페로 향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장사를 접었는지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는 온갖 화초만 가득했다. 혁재는 멀쩡하고 선아는 청하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취하지 않았고 자운 선생은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오랜만에 창문 너머 장하게 내리는 빗물을 보며 술을 마셨다. 선아는 그동안 많이 앓았다더니 정말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안쓰러운 선아. 빗속을 뚫고 늦은 밤 신포동으로 나온 것은 미친 짓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빗물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마시는 건 싫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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