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황진이를 추억하다... 본문
冬至(동지)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春風(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얼마나 절창인가. 황진이에 의해 '시간에 대한 주관적 변용'이 이루어진 대표적 시조다. 동짓달의 기나 긴 밤, 시간은 남아도는데,
정작 사랑하는 임은 찾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그 긴긴 밤 촛불을 밝히고, 외로움을 갈무리하는 안타까운 여심(女心)이 짠하게 느껴진다. 거문고를 연주하며 임의 얼굴을 그리다가 문득 '진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지금의 이 무료하고 외로운 시간들을 담아둘 수 있다면... 저장해 둘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혹 님께서 다시 나를 찾을 지도 모르는 봄날 밤... 지난 겨울 저장해 두었던 시간을 꺼내 임 앞에 굽이굽이 펼쳐내리...., 아마도 거기엔 내 애틋한 사연과 겨울밤의 외로움이 녹아들어 있어, 무심했던 임에게 밉잖은 투정과 사랑의 말을 대신 할 수 있으리라.."
남아도는 시간들을 저장해 두었다가 사랑하는 님이 오는 봄날 밤, 그 저장해 두었던 시간을 활용하겠다는 발상..... 기막히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연인들의 시간 감각은 보통의 그것과 다른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시간은 왜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건지.... 무심한 듯 시계를 보는 애인의 사소한 몸짓에도 철렁! 내려앉던 가슴....... 이런 경험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난 생각한다. 사랑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절은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름다운 법일 테니까..... 미묘한 내면 심리와 기다리는 여심(女心)을 이렇게 기발한 발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황진이, 나는 그녀를 감히 연시(戀詩)의 천재라고 말하고 싶다.
시공을 초월해 그녀의 애인이 되어 긴긴 시간 술잔을 나누고 싶은(나에게도 시간 마일리지가 제법 쌓여있다.), 그런.... 입춘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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