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봄밤, 그리움 그리고 불면 (3-21-금, 맑음) 본문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부드러운 봄바람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온다. 긴 겨울을 견디느라 닫아두었던 감정들이 그 바람의 촉감 하나에 순식간에 해동된다. 봄밤은 늘 그렇게 나를 무장 해제시킨다.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은데도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낮 동안은 사람들 속에 묻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다가도, 밤이 오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편이 시리다.
봄이 오는 걸 나는 눈으로 먼저 알기보다, 가슴으로 먼저 알아챈다. 낮은 여전히 미세먼지 자주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분명히 다른 빛깔이 감돌고, 길가의 나무들 끝에서는 희미한 연둣빛이 꿈틀댄다. 하지만 그런 변화보다 더 먼저, 나는 밤이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어둠이 덜 외로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고요한 얼굴로 다시 돌아온다.
당신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매년 봄이 되면 무방비 상태가 된다. 어떤 특별한 기억이 있어서라기보다, 봄 자체가 당신의 분위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봄의 분위기를 닮은 것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따뜻하지만 잡히지 않고, 가까이 있는 듯 멀고, 마음을 주려하면 어느덧 끝나고 마는 그런...... 그러니 봄이 돌아오면 자연스레 당신도 따라 돌아오는 셈이다. 이름 부르지 않아도,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그 익숙한 그리움.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낯익은 불면도 다시 찾아왔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눈을 감아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생각 끝에 떠오르는 기억들, 이를테면 함께했던 그 봄날의 시간들, 환하게 웃던 너의 얼굴, 바람이 불면 괜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던 습관까지. 지금은 사소해진 장면들이 그때는 전부였다는 걸, 왜 사람들은 지나간 후에야 그렇게 또렷이 깨닫게 되는 걸까.
불면은 괴롭지만, 어쩌면 내가 지금 이 계절을 진심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아직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감정이 있다는 뜻이니까. 무뎌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때론 그리움이 나를 깨어 있게 하고, 그 깨어 있음이 시가 되고, 기도가 되기도 한다. 내가 잠들지 못한 채 조용히 누워 있는 이 밤의 시간은, 단지 견뎌내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속 풍경을 다시 그리는 시간이다.
이제 머잖아 창밖으로 집 뒤편 교회당의 활짝 핀 벚꽃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잎사귀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은 늘 뭔가를 앞서가는 마음 같아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언젠가 당신은 말했지. “벚꽃은 너무 빨리 져서 안타까워.” 그 말이 그리움의 씨앗이 된 것일까? 벚꽃이 피고 질 무렵에도 나는 당신을 떠올린다.
불면의 밤을 지나 새벽이 오면, 마음속 편지가 펼쳐진다. 쓰지 않아도 이미 써 있는 편지. 도착하지 않아도 매번 보내게 되는 마음.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여전히 많고, 그 많은 말 중에 가장 솔직한 한마디는 이거다. “보고 싶어” 이 계절이 다 지나도록 오랜 그리움과 익숙한 불면은 잠시 눌러질 뿐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축복 같은 봄날에 늘 찾아드는 이 까다로운 질병 같은 불면, 봄이 와서 불면이 시작된 것인지, 불면을 앓으니 봄이 온 걸 알게 된 것인지, 이제는 도무지 구별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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