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폴 모리아의 '첫 발자국', 그리고 추억 (11-27-일, 맑음) 본문
중학교 입학하고 나서부터 3학년 겨울방학, 그러니까 졸업과 입학을 앞둔 1978년 겨울까지, 나는 나나 무스쿠리와 조앤 바에즈(Joan Baez), 스콜피언스와 레드 제플린, 폴 모리아의 음악과 산울림에 빠져 지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많은 팝송과 가요들 또한 내 애청곡 목록에 들어있었지만, 주로 내 마음을 울렸던 건 바로 이들 음악이었다. 국내 가수의 곡 중에서는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들이나 김정호, 신중현, 양희은, 송창식 등의 노래를 좋아했다. 지금도 그들의 히트곡 서너 개는 가사를 기억하고 있다. 텔레비전보다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를 선호하던 사춘기 시절, 그 음악들은 내 영혼을 다독거려준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특히 폴 모리아의 곡들, 이를테면 ‘Isadora’, ‘시바의 여왕’, ‘Love is blue’ 등의 애조 띤 멜로디는 예민한 소년의 가슴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엄마가 사주신 독수리표 셰이코 더블 데크 카세트는 너무도 소중한 나의 보물이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심야 음악 프로그램이나 오후 2시에 시작하던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를 (비롯한 팝 음악 방송을) 듣다가 애청곡이 나오면 공테이프에 그 곡들을 녹음하면서 제발 디제이의 멘트가 물리지 않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수고로움과 맘 졸임의 과정조차 그 자체로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중2 겨울 어느 날, 같은 교회를 다니던 이성 친구에게 초대 받아 (표면적인 이유는 기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는데, 사실 나도 그때 막 배우는 단계라서 그리 잘 치지는 못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그녀 책상에 놓인 카세트에서는 폴 모리아의 ‘첫 발자국’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음악 알지?”하고 그녀는 물었고 (‘알아?’가 아니라 ‘알지?’라고 물어봐 줘서 무척 고마웠다) 나는 “응, 나도 폴 모리아 테이프 가지고 있어”라고 대답한 후, 음악 방송이나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가수와 음악에 관한 잡지식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았다. 당시 또래 청춘들의 대중음악에 관한 기호와 지식 정도가 다르면 얼마나 달랐겠는가. 다 거기서 거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 관한 호감 때문인지 이야기 자체의 재미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가끔 질문하고 자주 공감해주면서 시종일관 내 이야기를 무척 예의 있게 경청해 주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인 E 누나가 빵과 주스, 과일을 가져다주었다. 고1이었던 누나가 방에 왔다 간 그 짧은 순간, 샴푸 향인지 비누 향인지 모를 좋은 향기가 온 방 안에 가득했다. 소꿉장난감 같은 포크로 사과 하나를 콕 찔러 내게 주던 친구의 볼이 사과처럼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 예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폭죽이 펑펑 터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무슨 말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생이 끝난 테이프는 오토리버스 기능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첫 발자국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때, 온 방 안을 촘촘히 채워가던 그 은은한 기타 선율은 사춘기 소년의 조율 안 된 감성을 사정 없이 흔들어 댔다. 폴 모리아의 기타 연주곡 ‘첫 발자국’은 밤새 내린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듯 그렇게 머릿속에, 아니 심장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지금도 이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뛰고, 친구의 잘 정돈된 방과 벽에 걸려있던 기도하는 예수님을 그린 성화(聖畫)와 E 누나의 샴푸 향이거나 비누 향이었을 기분 좋은 향기와 친구의 뽀얀 귀밑 솜털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통념은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녀와 나의 연애는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그녀와 연락이 닿아 함께 파주 해이리 마을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그녀에게 혹시 오래전에 우리가 함께 들었던 ‘첫 발자국’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나를 만난 건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 때문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차를 돌려 오면서 엠피3 아이팟의 폴 모리아 방에 저장되어 있던 ‘첫 발자국’을 비롯한 폴 모리아의 연주곡들을 인천에 도착할 때까지 들으며 왔다. 어린 시절, 우리가 순수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녀는 딸의 입시와 골프, 다른 친구들의 동정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가끔 웃을 때는 오래전 내가 기억하는 소녀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고생하지 않고 곱게 나이를 먹어온 것 같았다. 이후로 몇 번 친구들 모임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긴 했지만, 그녀를 다시 보진 못했다. '011'로 시작하는 그녀의 연락처를 최근 삭제했다. 다시 만나지 못해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맞다. 추억은 품고 있을 때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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