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近來安否問如何 (11-25-금, 맑음) 본문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떻게 지내시나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밝은 사창엔 소첩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만일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문 앞의 돌길은 이미 모래가 되었겠지요.
생각의 문이 조금씩 조금씩 닫히고 있는 느낌이다. 그 문을 통해 상상력을 머금은 문장과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제 그 문이 닫히고 있거나 뭔가에 의해 막혔다는 느낌. 하, 그런데 비록 ‘느낌’이라는 꼬리가 달렸지만, 막혔다고 단언적으로 표현하는 건 슬프니, 막힐지도 모른다고 완화해서 표현할까. 사실상 달라지는 건 없다. 닫히고 있으면 굄목을 궤거나 끈을 매어 걸어 놓으면 되고, 막혔다면 뚫으면 될 일이지. 나에게는 생각의 문이 닫히는 걸 막아주는 굄목이 독서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좋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일이며 걷고 또 걷는 일이다. 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하긴 진한 사랑이라는 표현도 동어반복이다. 진실한 사랑이라면 진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다만 진부함, 좋은 의도라고 해도 반복되는 생활의 루틴(이를테면 너무 잦거나 지나친 음주와 같은), 미움, 분노, 경박함, 식욕, 게으름, 무기력 등은 생각의 문을 닫게 하는 육중한 돌덩이다. 슬픔은 때때로 마음을 정화해주니 가끔 슬픔에 젖어볼 필요도 있지. 슬픔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과연 있을까?)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아니 이처럼 닫히는 원인과 여는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데 어째서 생각의 문이 닫히는 걸 막지 못하고 있는 거지? 혹 절실함이 없기 때문일까. 절박함이라 해도 무방한, 바로 그 절실함. 시에도 사랑에도 절실함이 없는 것이 분명해. 타고난 재능은 이제 소진되고 없는데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거지. 언제나 내가 부르면 쪼르르 글이 오고 시가 달려오리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사랑을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한 치장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하면 좋고 안 해도 무방한 뭐 그런……. 치명적인 거지. 절실함이 부족하다면 말이야. 다소 결은 다르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과 애인을 향한 연정이야말로 생각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기제들인데, 문제는 그 두 가지 모두 절실함과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좀 더 절실해질 필요가 있어. 절실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거지. 그건 용기와 부끄러움의 차원을 넘어서는 거야. 옆에 있어 언제건 만날 수 있다고 다 사랑은 아닌 거지. 무모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지. 생각의 문이 기어이 닫히거나 이미 문 안쪽의 세상을 진부함이 점령하고 있다면, 그 문이 열려 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낡은 상상력과 침울함과 열패와 시기와 모멸과 위선과 위악과 싸구려 감상만 폴폴 새어 나올 텐데, 그건 영혼의 죽음 아닌가. 그리하여 (글이 씌여진 맥락은 다르지만) 조선의 여류 시인 이옥봉의 시구를 빌려 내가 내 영혼에게 안부를 묻는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떻게 지내시나요?”
저녁에는 신포동에서 혁재를 만났다. 12월 공연 관련 회의에 매니저 자격으로 참가했지만, 사실 술 마시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근직이도 한섬이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혁재는 집에서 출발하고 나는 교육청에서 출발했다. 내가 조금 먼저 도래순에 도착했고, 기다리며 혼자 고량주 한 병과 짬뽕국물을 시켜서 먹고 있었다. 30분쯤 지나서 혁재가 도착했고, 또 30분쯤 지나서 한섬이와 근직이가 도착했다. 그들은 혁재의 공연과 관련하여 대화를 나눴고, 공연 콘셉트에 관해 혁재와 기획자인 한섬이의 의견이 달라서 조율하는 과정을 가졌다. 한섬이는 유료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있고, 혁재는 무료 공연을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혁재의 의견대로 무료로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10만 원을 한섬이에게 주며 혁재 공연과 관련해서 '우리 가수'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섬이는 "좋은 매니저네요" 하며 웃으며 돈을 받았다. 회의가 끝나고 근직이와 한섬이는 먼저 가고 근처에서 우연하게 만난 자운 선생과 신코로 이동해서 2차를 했다. 그 자리에는 은준이도 합류했다. 신코를 나와서는 다시 동화마을로 이동했는데, 고량주와 소주를 섞어 마셔서 그런가 몸이 좀 부대꼈다. 잠시 앉아 있다가 일행들에게 말을 하고 먼저 귀가했다. 그나저나 내 시 '가수 승미'에 곡을 붙인 노래를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소개한다고 하는데,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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