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산책하지 않는 도시 산책자 (11-24-목, 맑음) 본문

산책을 못한 지 꽤 되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숲이나 공원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 시간이 없어서 걷지 못하는 건 분명 아니다. 귀찮아졌거나 다른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겠지. 꼭 건강상의 이유로 걸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길이 좋았고 숲이 좋았으며 걷는 게 좋았다. 걸으며 만나는 풍경과 가끔 지나치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잡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 시간이 좋아서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계획했던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황량해졌을 때, 무거운 등짐처럼 고민거리를 가득 지고 숲이나 공원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희한하게 지고 갔던 등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마음의 등짐이 무거울수록 산책의 강도를 높이며 골칫거리와 정면으로 마주하곤 했는데, 집과 사무실의 책상 앞에서는 그럴수록 오히려 마음의 동요가 심해졌는데, 산책길 위에 있을 때는 뭔가 환하게 길이 보이는 듯도 했고, 누군가 위로해주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확실히 산책은 명민한 영혼들을 철학가나 시인으로 만들어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길 위의 삶을 진지하게 다뤘거나 길 위에서의 투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시인들을 본능적으로 신뢰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산책하지 않고 있어 길 위의 목소리와 스스로 품을 보여주는 풍경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산책하지 못하는, 아니 산책하지 않는 ‘산책자’의 존재 이유가 있을까. 물론 ‘길’은 모든 곳에 있고,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 또한 한결같이 다양하다. 다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관념 속의 길이거나 내 방 책상 앞의 모니터 안에 있거나 자주 가는 술집 안으로 한정된 길일뿐이다. 바람과 꽃과 나무와 새들, 하늘의 구름과 눈 시린 가을볕이 함께 걷는 길이 아니다. 서재나 책상의 모니터 앞에서 관념 속의 길을 걷는 건 진정한 의미의 산책이 될 수 없다. 헬스클럽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을 산책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골방을 벗어나는 일, 모니터 속 세계를 벗어나는 일, 술잔을 앞에 둔 명정(酩酊)의 시간을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 모든 비본질적, 유사(類似) 산책을 극복해야만 나는 산책자의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또 그럴 때라야 비로소 관념 속 산책에서조차 산책의 즐거움과 숨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생길 것이다. 관념 밖에도 관념 안에도 가야 할 길은 많다. 산책자의 행로에는 끝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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