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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4월 9일 토요일, 맑음ㅣ후배가 우리동네에 왔다 본문

일상

4월 9일 토요일, 맑음ㅣ후배가 우리동네에 왔다

달빛사랑 2022. 4. 9. 00:06

 

늙은 개의 오후처럼 권태로움과 한가로움이 뒤섞인 4월의 주말, 대공원 벚꽃이 생각나 산책이나 다녀올까 생각 중이었다. 옷장에서 봄철 등산복들을 꺼내 스팀다리미로 주름을 펴고 등산화와 배낭을 확인했다. 배낭에는 언제인지 모를 산행에서 쓰던 나무젓가락이 무더기로 나왔다. 테라스에 나가 먼지를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걸어놓고 산책에 가져갈 가벼운 물건들, 이를테면 식수, 태블릿, 수건, 커피 등을 준비했다. 시간은 11시 30분, 공원을 두어 바퀴 돌고 난 후 공원 동쪽 끝 만의골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집을 나서려고 할 때 은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첫 마디가 “형, 이렇게 날 좋은 봄날, 막걸리 한잔해야죠?”였다. 그 친구는 한 번 전화하면 그간 있었던 일과 최근의 동정 모두 풀어놓기 때문에 통화는 3~40분을 넘어가기 일쑤였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 담에 걸려 병원에 다닌 이야기와 그 이유로 술을 마시지 못한 게 열흘 가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중간중간 곁가지를 치며 40분 동안 이어갔다. 잠자코 듣다가 말을 끊으며 “지금 벚꽃 구경 가려고 했는데, 너도 나랑 공원에나 가자.”하고 제안했더니 “울 엄마 매일 대공원 산책 다니시는데, 엄마 말로는 벚꽃이 아직 만개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라며, 맛있는 술안주를 준비해 놓을 테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타이밍 한번 기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집에 가든 안 가든 오늘 산책은 글렀다는 생각이 아프게 몰려왔다. “네 말 대로 이 아름다운 봄날에 집에 틀어박혀 술을 마신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음……” 하고 망설이다가 “그럼 네가 우리 동네로 와라.”라고 제안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환해졌을 것이다. 우리 동네로 오라는 것은 산책을 포기하고 자기와 만나겠다는 의사표시라는 걸 간파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벚꽃을 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은준이는 정확하게 한 시간 후인 1시 30분에 만수역에 내려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점심을 겸해서 낮술을 마셨다. 집 앞 정육식당에 가서 삼겹살과 소주 두 병을 마신 후, 구월동 갈매기로 이동하자는 은준의 제안을 만류하고 근처 횟집에 들어가 물회를 안주로 소주 두 병을 더 마셨다. 두 장소를 오가며 소주 다섯 병을 나뭐 마셨으니 낮술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었고, 두 사람의 주량으로 따지면 적당량이었다. 취기가 도는지 은준이는 우리집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겠다고 했다. 3차를 가자고 보채지 않은 걸 보면 정말 취기가 몰려왔던 모양이다. 집에 도착해 책꽂이 앞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커피 대신 사이다 두 잔을 마신 은준이는 “희한하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취하지” 하며 약간 풀린 눈으로 돌아갔다. 문밖까지 배웅한 후 나는 라면 하나를 끓여 먹었다. 각각의 안주와 음식은 위장 속에 저마다 들어가는 자리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술 마시고 돌아오면 매번 면이 당긴다. 취기가 아니었다면 냉면을 끓여먹었을 거다. 계란 삼고 면 헹구고..... 냉면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서 포기했다. 대신 라면에 양파와 파를 많이 넣었더니 맛이 괜찮았다. 연신 면치기를 하면서 하루를 복기했다. 그렇다.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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