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11월의 마지막 날, 다시 서울행(실천문학사) 본문
이른 아침, 아랫집 주인아주머니께서 식혜를 담갔다고 손수 가지고 올라오셨다. 고마워해야 하는 건데 왜 마음 한 편에는 귀찮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지 원. 아마도 잠옷바람에 설거지를 하다가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매번 그렇다. 고마워야 할 순간에 귀찮다고 느끼고, 다시 그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는 정서의 악순환이다.
그나저나 오늘 출판사엘 가야 한다.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실천문학사까지는 우리집에서 두 시간이 넘게 걸린다. 따라서 12시 점심 약속에 늦지 않으려면 10시 전에 나가야 한다. 실천문학사에 들러 대표와 시집 출간에 대한 마지막 의견을 나누고 돌아오면 아마도 오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날이 차다.
1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당신과 내가 남긴 말들이 삭고 다시 삭아서 다만 마른 낙엽처럼 부석거릴 때쯤 우리는 잠시 서로를 그리워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 가다가 닿지 못한 말들이 되돌아와 책상 위거나 책갈피 사이거나 내 발등 위로 체념한 채 더께로 쌓이고 더러는 문신처럼 가슴에 상처로 앉을 때, 그때 나는 나 자신이거나 혹은 당신에게 한없이 미안한 시간의 어디쯤을 헛헛하게 헤매고 있을는지. 요즘 나는 당신에게 가는 길을 종종 잃곤 한다.
2
오래 전 나는 미증유(未曾有)의 절망을 경험했다. 지금도 절망이 데려다 놓은 바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갑자기 캄캄한 방안에 들어갔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어둠에 적응이 되듯 나는 주변의 사물과 상황들을 조금씩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3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몇 가지의 징후들이 나타났으나 추락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나는 그 징후들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문득 허방다리를 디딘 것처럼 내 삶이 휘청하고 허물어지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절망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누구든 절망의 냉혹한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추락하는 순간에야 지금껏 움켜쥐고 살아왔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조악하고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얼마나 아프고도 소모적인 일인지. 내 몫이 아닌 것들이 달아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후회는 아무 것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4
만약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나는 일정한 형식으로 고착된 행복과 예측 가능한 불행 중 어느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지. 퇴근길, 보름을 며칠 앞 둔 부푼 달을 보자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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