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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기다리는 눈은 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늘 성취되는 건 아니어서 별로 서운하지는 않다. 단지 이번 주 날씨를 확인하다가 오늘쯤 눈 내릴 확률이 크다는 예보를 봤을 뿐이다. 물론 변죽조차 울리지 않았던 건 아니다. 몇 차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낮게 내려앉으며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눈은 없었다. 나이를 먹어도 하늘에서 뭔가 내리면 왜 그리 좋은지. 비도 괜찮고 눈도 괜찮고 심지어 진눈깨비도 괜찮다. 그래도 더 나은 걸 고르라고 하면 눈보다는 비가 좋다. 눈에 얽힌 추억이 참 많다. 애인들과 함께 맞았던 밤눈에 관한 추억부터 백마에서 자취하던 친구의 집 방문을 열었을 때 만났던 눈도 있다. 그 방은 문을 열면 바로 툇마루와 마당과 멀리 들판까지 훤하게 보이는..

아침에 용산의 알코올중독자가 공수처 수사관들과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수많은 국민이 노심초사하며 그의 체포 과정을 지켜봤다. 중화기를 들고 다니며 마치 무력도 불사할 것처럼 실력행사를 하던 경호처 직원들은 막상 경찰이 진입하자 순순히 체포에 협조했다. 다행히 경호처에는 차장 김 아무개처럼 권력의 개가 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상황 판단을 잘못한 직원이 돌발행동을 해서 경찰과 경호처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며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국민은 일단 안심했다. 하지만 알코올릭 돼지는 우리에서 끌려 나오면서도 온갖 요설을 내뱉어 국민의 짜증을 가중했다. 자기는 잡혀가는 게 아니라 자진 출두하는 거라나 뭐라나. 요망한 돼지의 친구인 돌(石) 변호사는 범법 운운하며 자기 친구를 변호했는데, 그 변호의 ..

어제 혁재는 나에게 두 번 전화했다. 한 번은 점심때, 또 한 번은 밤 8시 30분쯤이었다. 점심때 한 전화는 내가 휴대전화 전원을 저녁 7시까지 꺼 놓았기 때문에 받지 못했고, 8시 30분에 건 전화는 화장실에서 받았다. 혁재는 “어제 우리가 먼저 치킨집을 나오느라 형을 못 챙겼어요? 별일 없었지요? 경락이 형 한 대 깐 건 아니지요? 걱정돼 연락했어요. 점심때 전화했는데 전화 꺼놓으셨더라고요” 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렇듯 술 마신 이튿날 안부를 물어주는 후배들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그들이 나가고 이내 뒤따라 나왔다는 말과 함께 어제 건환 형 등과 마신 전작에 관한 이야기를 혁재에게 전했고 그는 “예, 알고 있어요” 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술집에서 나오는..

대체로 유튜브를 보거나 영화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오후에 침대에 누웠을 때 문득 박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이 생각났다. 내 삶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저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란 구절이 떠올랐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러다가’라는 시구가 아프게 다가왔다. 그 시구가 나에게는 ‘이렇게 살다가는’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몰두하면 주변의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나의 성향상 그 ‘어떤 일’이 부정적인 일일 때 나는 매우 위험하다. 부정적인 일일수록 더욱 매혹적인 법이다. 우리 몸을 조금씩 망가뜨리는 당분은 얼마나 달콤한가? 나는 유혹에 약하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가 썩는다는 말이 있다. 재미있는 일이나 놀이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잊어..

며칠 무리했던 탓인지 어젯밤엔 숙면했다. 이런 날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몸이 가볍다. 운동하고 침구 정리한 후 쑥차와 우엉차를 끓여놓았다. 온 집안에서 쑥 냄새가 났다. 확실히 쑥차 향이 우엉차보다 강했다. 점심으로는 팩으로 나온 곰탕 국물에 달걀 두 개, 냉동실에 있던 물만두와 부산어묵을 넣고 팔팔 끓여 먹었다. 마지막에 숙주도 한주먹 넣었다. 먹을 만했다. 점심 먹고 식후 운동 40분 한 후에 건환 형의 전시가 열리는 신포동에 나갔다. 전시장(아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형은 혼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 측에서 요청한 초대전이다 보니 전시된 작품들 대부분 이전 전시와 작품집에서 이미 본 작품들이었다. 형이 전시회를 할 때나 작품집을..

기온이 많이 올라갔다. 사실 오늘도 영하의 날씨였지만, 어제 그제 워낙 그악스럽게 추웠던 탓인지 바람도 불지 않은 오늘은 흡사 봄날씨처럼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극기 훈련을 하는 이유도 아마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의도적으로 조성된 극한 상황을 겪고 나면 웬만한 어려움은 만만해 보일 테지. 그래서 오랜만에 채소가게 들러 떨어진 채소(콩나물, 숙주, 청경채, 상추, 깻잎, 호박, 오이 등)를 샀다. 오이 값이 너무 비싸 (작은 크기의 오이 4개에 3천 원) 살까 말까 한참 망설였다. 계산대의 아주머니는 마치 자신이 채소 값을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모든 걸 다 떠나서 겨울에 여름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것 만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다만 이렇게 비싸게 팔아도 남은 이익..

새벽에 들어와 한숨 자고 출근한 것치곤 컨디션이 괜찮았다. 종일 숙취 없이 근무했다. 새벽에 설렁탕을 먹은 게 도움이 된 듯하다. 퇴근길 전철 역사에서 혁재에게 연락했다. (함께 새벽을 견딘 동지로서) 몸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려고 전화한 건데, 아니나 다를까 만석동 기성의 치킨집에서 로미, 산이와 함께 술 마시고 있었다. 하도 오라고 성화를 해 결국 집에 가려다 만석동으로 발길을 돌렸다.치킨집에 도착하니 산이와 로미는 멀쩡하고 혁재는 눈이 약간 풀려있었다. 산이의 반려견 나무(tree가 아니라 '나무 아미 타불' 할 때의 그 '나무')도 함께 있었다. 개업하고 처음이라 혁재 일행의 술값을 포함하여 10만 원을 선결제해주었다. 늘 언제 들를 거냐는 기성의 성화가 무척 부담스러웠는데, 오늘 그 부채감 하나 ..

어제 얼추 12시가 다 되어가는 야심한 시간, 일기를 쓰고 있다가 카페 ‘산’의 대표 성식의 전화를 받았다. 혁재와 로미가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오라는 전화였다. 하루 중 내가 가장 평화로움을 느끼는 고즈넉한 성찰의 시간을 방해하다니, 새해부터 이 얼마나 큰 민폐란 말인지. 전화한 성식이가 야속했다.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 날도 갑자기 추워져서 전화를 끊고도 많이 망설였다. 그때 나가면 필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서너 시나 되어야 돌아올 텐데, 더구나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정말 고민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카페 ‘산’에 들러 혁재와 로미를 만났다. 나를 움직이게 만든 건 일종의 부채감이었다. 작년 연말 상훈의 부친상과 다른 일정 때문에 혁재의 공연에 가지 못했고, 송년회도 함께하..

엄마가 하늘나라 가신 지 만 4년이다. 4년 전 오늘 새벽, 엄마는 나만 남겨놓고 하늘에 들었다(入). 지금도 그 새벽, 홀로 주무시다 운명하신 엄마와 그런 엄마를 혼자 떠나보내야 했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슬프면서도 장엄하고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고마웠던 그날, 그 새벽의 고독했던 시간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흑백 판화 같은 이미지로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같은 계절, 같은 시간의 이미지는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법인가, 오늘도 그날처럼 갑자기 추워졌고 며칠 전에는 그때처럼 큰 눈이 왔으며 오늘 밤에도 조금 전부터 눈발이 펄펄 날린다. 기묘할 정도의 기시감이다. "나를 기억하렴" 하는 엄마의 메시지일까? 지난 4년 동안 큰 변화는 없었지만, 작고 사소한 변화는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담..

말린 쑥과 우엉을 구매했다. 지난 연말 인천민중연합 옛 동지들의 송년회에서 황모(某) 선배가 준 동차선방(황 선배가 운영하는 찻집)의 쑥이 떨어져서 구매한 것이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쑥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쑥의 매력에 푹 빠졌다. 향도 그윽하고 몸에도 맞는 느낌이다. 봄이면 들판에 지천으로 돋아나는 야생초인 쑥이 이렇듯 그윽한 향의 전통, 건강 차로 거듭나는 걸 보면 세상 모든 만물은 다 나름의 쓰임을 품고 존재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다만 받자마자 우려서 마셔봤는데 확실히 맛과 향 모두 황 선배의 쑥이 훨씬 탁월했다. 하긴 황 선배의 쑥은 자신의 찻집에서 직접 손님들에게 팔고 있는 상품이다. 아무래도 ‘선수’들과 단골을 상대로 장사하려면 쑥의 선택과 관리 모든 면에서 각별한 신경을 써야 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