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2024년 크리스마스이브 (12-24-화, 흐림) 본문
이렇게 조용한 크리스마스이브를 경험한 적이 없다.
내가 스스로 번잡함을 피해 거의 은거(隱居) 수준으로 방콕 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도 내 골방 밖의 세상은 무척 요란했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이를테면 채소가게 들러서 각종 채소를 구매했고, 세탁기에 빨래를 돌렸으며 입지 않는 옷을 분류해 따로 쌓아놓았다. 또 실내 자전거가 페달을 밟을 때마다 잡소리가 들려 서비스도 신청했다. 심지어 잘못 배달된 택배(문화재단에서 나에게 보낸 8권의 책인데, 내가 있는 3층 정책특보실이 아니라 2층 정책기획조정팀으로 잘못 배달되었다)를 출근한 보운 형에게 연락해 되찾아 놓기도 했다. 오후에는 낮잠도 자고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저녁에는 오전에 사 온 채소들을 넣고 비빔밥을 먹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오후에 S의 연락이 없었다면 내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은 고즈넉한 평상시의 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낮잠을 자다가 S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표면적인 용건은 제고 후배 양 모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S는 용건을 밝힌 후, “형 지금 어디세요? 회사예요?” 했는데, 나는 그 질문이 “별일 없으면 술 한잔 사주세요”로 들렸다. 평소 그를 무척 연민하는 나로서는 그가 만나자고 하면 대체로 응하는 편이다.
결국 인천집에서 S와 만나 민어회에 소주 3병을 마셨다. 일 도와주러 가게에 나와 있던 사장의 친언니가 오며 가며 우리 자리에 앉아 함께 소주를 마셨기 때문에 나와 S가 먹은 술은 1병 2잔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 우리의 주량을 생각하면 이상하리만치 적게 마신 셈이다. 심지어 비싼 민어회를 남기기까지 했다.
오늘 새롭게 안 사실인데, S는 현재 신용불량 상태였다. 근래에 갑자기 신불자가 된 게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그랬고, 친구들과 은행권에 진 빚의 규모가 수억 원에 달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가슴이 다 철렁했다. 나 역시 오래전, 방만한 사업 경영과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 때문에 수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봤다. 하여, S가 현재 겪고 있을 어려움이 충분히 이해됐다. 그래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현재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곧고 빠른 길은 알고 있기에 주저리주저리 진심을 담아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는 묵묵히 듣다가 “그렇지 않아도 형 말처럼 모종의 결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긴 해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가 무척 늙어 보였다.
인천집을 나와 S는 “맥주나 한잔 더하고 가요. 내가 계산할게요” 했다. 그래서 1차를 마친 후의 루틴대로 ‘비틀즈’에 들렀다. 카페까지 걸어가며 둘러본 크리스마스이브의 밤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캐럴도 들리지 않았다. S는 “상점들이 실외 스피커를 없앤 건 저작권 때문일 거예요”라고 말했는데,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든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 같은 찬송가도 (실외 스피커를 통해 행인들에게 들려주면) 저작권 위반에 해당하는 걸까 잠깐 의문이 들었다. 문득 10여 년 전, 많은 눈이 내린 날, 후배들이 술 마시다 일제히 우리 집에 몰려와 자고 간 일이 생각난다. 그때 그 무리 중에 S도 있었다. S는 다른 후배들보다 먼저 내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때 그가 입고 있던 헐렁하고 낡은 러닝셔츠가 가슴을 짠하게 했던 기억도 난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자세로 잠이 들었고 깰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였다.
‘비틀즈’에는 시간이 갈수록 남녀 손님이 들어찼다. 9시 30분쯤, 카페는 만석이었다. 우리는 서너 곡의 노래를 신청해서 듣다가 눈치 보여서 일찍 나왔다. 사장인 유철 형이 따라 나와 안부를 묻고 배웅해 주었다. S는 버스 타러 순복음교회 방향으로 걸어갔고 나는 전철을 타기 위해 역 쪽으로 걸어왔다. 6번 출구에 들어설 때 은준에게 전화가 왔다. 제물포 명수네 집에서 소주 한잔 하는 모양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해 주고 플랫폼으로 내려가니 이내 전철이 도착했다. 전철 안에서 H의 크리스마스 축하 문자를 받았다. 그녀는 잘 있는지 궁금하다. 조만간 연락해 밥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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