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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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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시집을 다시 읽다 (2-12-월, 맑음)

달빛사랑 2024. 2. 12. 23:18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 콕 틀어박혀 보낸 설 명절이었다. 수십 통의 문자와 서너 통의 전화가 내게 왔지만, 정작 내가 만난 건 아이스크림과 오이를 사기 위해 들른 슈퍼 아주머니와 정육점 사장님이 전부다. 쓸쓸하다기보다는 무척 평화롭고 고즈넉했던 사나흘이었다. 설 명절 내내 유튜브나 영화를 보았고 가끔 오래된 시집들을 뒤적거렸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최승자 시인의 시를 40년 만에 다시 읽었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시인의 아픔이 시구들 속에서 맹렬했다. 나는 명절 내내 묘비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가장 아름답고 환한 시절인 20대의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다지도 처연한 것인지. 모든 시편 속에서 배어 나오는 실연의 아픔, 삶에 대한 절망, 염세와 자조를 읽으며 나도 같이 아파했다. 여물지 않은 감상과 치기, 자발적 페시미즘의 흔적이 없진 않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시 앞에서는 치열했던 것 같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면 그걸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그녀의 삶이자 전부인 시를 대하는 태도가 정령 이러했다면 인간 최승자는 페시미스트였다 할지라도, 시인으로서의 최승자는 행복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물론 시인 최승자가 스스로 “나는 행복한 시인이야”라고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연휴의 마지막 날, 내 문학적 삶을 돌아보기에 딱 알맞은 시집을 읽은 셈이다.

 

올여름의 인생 공부 

                                                        최승자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존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식은 더욱 원숙했지만

자칫하면 서××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도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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