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매일 그럴 수는 없겠지만 (11-20-월, 맑음) 본문
11시, 민주화운동센터 자문회의가 있었지만, 날짜와 시간을 착각해 참석하지 못했다. 사무처장 은주의 다급한 전화를 듣고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어제까지 사흘 연이어 술 마신 후유증일 수도 있다. 내가 술(酒)이나 몸의 입장이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좀 지쳐야 정상 아니야?" 하고 질책했을 테니까. 회의 참석이 무산된 후 출근할까 쉴까를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사무실에 전화해 보운 형에게 오늘 쉬겠다고 연락하고 대청소했다. 사람들이 왔다간 후 먼지와 머리카락이 많이 눈에 띄었다. Y 혼자 왔다 가도 엄청난 머리카락이 방 안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하물며 3명의 남자와 3명의 여자가 내 방을 다녀갔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생각보다 머리카락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한밤중에 은준이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어제 오후에 술 취해 들어왔을 때 내가 졸거나 자느라고 못 보았던 사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과일과 소파 커버를 갖다 주려고 집에 들렀던 작은누나와 마주쳤던 모양인데, 은준이 누나 앞에서 자기와 혁재를 소개하며 성악 톤으로 찬송가를 불렀고, 그걸 보고 누나가 큰소리로 웃었다고 한다. 내가 봤어도 '희한한 녀석들이군' 했을 것이다. 기분 좋게 웃은 건지 억지로 웃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웃었다니 참 다행이다. 누나가 가고도 한참 있다가 노래할 수 있는 곳에 가서 한잔 더 하자는 혁재의 제안을 뿌리치고 자신은 곧장 집으로 갔다는 게 은준의 말이었다. 그도 역시 취했을 게 틀림없으므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 중 생략되었거나 자신의 주관으로 윤색하여 재구성한 부분도 있을 수 있으므로 모두 믿을 수는 없다.
매일 어제 그제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그래서도 안 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나만의 일탈은 확실히 삶의 활력소가 된다. 다만 소풍에서 돌아와 잠들었다 깬 이튿날의 아침처럼 뿌듯한 기억과 함께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묵직하게 밀려와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건 어쩔 수 없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마을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곳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이거나, 다른 이들은 모두 서로서로 암호로 이야기하거나 눈빛으로 뭔가를 주고받는데 나만 그 은밀하게 주고받는 눈빛 언어나 암호들을 해석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그런 느낌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만약 잠시나마 즐거웠던 일탈의 대가가 바로 그 쓸쓸함과 허전함이라면?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밖에.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냥 그런 하루 (11-22-수, 약간 흐림) (0) | 2023.11.22 |
---|---|
탄수화물 그랜드 슬램 (11-21-화, 맑음) (1) | 2023.11.21 |
낮술 (11-19-일, 맑음) (0) | 2023.11.19 |
주점 갈매기 16주년 기념잔치 (11-18-토, 맑음) (0) | 2023.11.18 |
눈비 내린 날, 후배들 나를 찾다 (11-17-금, 첫눈, 비) (0) | 2023.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