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나에게는 첫눈 (12-06-화, 눈 내린 후 갬) 본문
며칠 전에도 눈은 내렸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눈은 이미 녹아 볼 수 없어서 내린 줄도 몰랐다. 내가 보지 못한 눈은 첫눈이 될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직접 보고, 맞고,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어야만 첫눈이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내린 눈이 내게는 첫눈이다. 풀풀 날리는 눈발을 내가 보았고, 테라스 위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찍었으며 잠깐이지만 도시를 하얗게 물들였다. 이른 아침의 기세와는 무색하게 오전이 다 가기 전에 눈은 이미 녹아버렸지만, 분명 거리에서 맞았다면 설렜을 것이다.
오래전에는 첫눈에 특별한 의미를 많이 부여했다. 애인이 있었고, 동료가 있었고, 술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술꾼에게 첫눈은 음주에 관한 좋은 핑곗거리다. 눈이 안 와도 술 마셨겠지만, 눈이 와서 술맛은 더 좋았을 게 분명하다. 애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잠시나마 설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같은 하늘 아래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서로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눈은 공기의 결, 도시의 색깔을 변화시키고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한다. 맑은 날의 도시와 눈 내리는 날의 도시, 그 달라진 틈새로 뜻밖의 설렘이 스미는 것이다. 눈 내리는 날 오후의 전화는 그게 누구이든 얼마나 반가운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달뜬 목소리들, 우리는 서로에게 너그러워진다.
쌓인 눈을 보고 H에게 출근할 때 눈길 조심하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예, 조심조심, 자박자박 걸을게요”라는 답장이 왔다. ‘자박자박’이라는 단어가 정겨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눈길을 걷게 된다면 자박자박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아침에 내린 눈 때문일까. 오늘 하루는 무척 풀어진 채 보냈다. 여느 때 같았으면 풀어진 하루가 죄스러웠겠지만, 오늘은 나 자신에게 종일 너그러웠다. 눈 덕분이겠지. 가끔 이런 날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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