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본문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 남진우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몇 닢 은전과 함께 외출하였다. 목조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쾌감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시를 태워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픈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 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 속으로 한없이 하강하는 헝가리언 랩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 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십이사도의 눈꺼풀에 주기도문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대명사. 솟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랑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 오른다. 흐느적거리는 밤공기 사이로 킬킬대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 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다. 쉬잇 설레는 잠의 음계를 밟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소리, 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다디단 그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혼수로부터 꿈을 길어 오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 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 켜고 기다리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지중해의 녹색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자정이 되면 그대와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설해림.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선박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 군요. 바람 부는 해안 푸른 고요 속에, 목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자정의 해안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유년의 마을 어디쯤 떠오르는 북두칠성. 지상의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봄을 담은 바람이었지만 약간 서늘했다. 바람에 담긴 봄만 보았을 뿐인 몇몇 사람들의 옷차림에는 방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방심한 옷차림 속으로 스며들어 킬킬대던 바람은 오후가 되면서 비로소 순해졌다. 순해진 바람은 겸손하게 휴식 중인 빨래 속으로 스며들어 오후를 보냈다. 늘어졌던 빨래들은 바람과 더불어 나풀나풀 춤을 췄다. 간간이 바람이 재채기를 할 때마다 무심코 거리를 배회하던 플라스틱 음료수 병 하나 오후 두 시의 느긋한 풍경 위로 팔딱 재주넘고 떼구루루 구르며 뜻밖의 선율을 만들어 내곤 했다. ‘비자발적 유폐’ 기간 동안 거울 속의 나를 만나는 것이 종종 불편했지만 오늘은 정리되지 않은 내 머리카락이 부끄럽지 않았다. 문득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가 떠올랐다. 테라스에 나와 담배를 피우며 한참을 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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