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생명을 준다는 것은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 본문
“건축학을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한 것이라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글을 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한다. 한 편의 글에 그런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資材)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나는 믿는다. 그런 문장은 한 번 쓰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한다. 가급적 각 단락의 길이를 똑같이 맞추고 이를 쌓아 올린다. 이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반영해야 한다). 이제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한 단락도 더하거나 빼면 이 건축물은 무너진다(무너져야 한다).
이 셋을 떠받치고 아우르는 더 중요한 원칙이 있다.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별로 없으므로,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이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줘야 한다는 것.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줄 수 있다. 생명은 ‘일생’이라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간이라는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듣기의 철학』(와시다 키요카즈, 아카넷, 2014)에 따르면 ‘터미널 케어’(말기 간호)의 본질은 환자가 ‘어떤 병원에서 어떤 의료 행위를 받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있다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케어이므로, 케어란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도 그렇지만 글쓰기도 그렇다.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안 준 것이다. 여기 묶은 글들은 내 8년 동안의 생명 중 일부를 주고 바꾼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쓰면서 나는 죽어왔다. 그러나 이 글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책머리에’ 중에서
글에 대한 젊은 비평가의 도저한 순정함이 느껴지는 글이다.
나 역시 다양한 층위의 슬픔을 곁에 두고 산 지가 제법 오래되었다.
슬픔도 과연 공부가 가능한 것인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확인해 볼 생각이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시간을 준다는 것이라는 저자의 언명을 염두에 두고
나 역시 시간의 결과물인 저자의 저서에 내 시간을 줘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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