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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김응교 선배로부터 시집 발문을 오늘에야 받다 본문

일상

김응교 선배로부터 시집 발문을 오늘에야 받다

달빛사랑 2017. 10. 24. 12:57

소 힘줄 같은 연대의 내력

 

김응교(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한 편의 시가 나오기까지 온몸은 얼마나 많은 반응을 하는가. 피로 쓴 문장을 사랑한다는 니체, 일 년 동안 세포에 문장을 넣었다가 한 줄 가까스로 얻는다는 윤동주, 시는 온몸으로 써야 한다는 김수영의 말은 빈 말이 아니다. 시에 신체의 움직임이 보이는 흔적은 온몸으로 시를 쓴다는 증거다. 온몸으로 쓴 시는 한번만 읽어서는 안 된다. 문계봉의 첫시집 첫시에는 신체의 움직임이 명확히 나타난다.

 

소 힘줄 같은 고집과

힘줄의 탄력만큼이나 질긴

가난이 내력이었지

일찍 바람이 되어

밑으로 흐르는 법을 배운 아비와

허기만큼의 높이로 자꾸

몸을 숙이는 들풀 같은 자식들

미래가 던지는 몇 마디의 농담에도

발끈 불안하여 세월의 멱살을 잡는

눈물겨운 공격성 그러나

가진 것 없어서 낭패도 모르는,

기다림 속에서 든든하게 무장된

삶의 게릴라 혹은

운명과의 싸움꾼들.-자화상家系전문.

 

이 첫시에 문계봉 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동사는 눈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뇌를 움직여 상상하고, 냄새를 떠올리는 육체적 반응을 포함한다. “소 힘줄 같은 고집”, “힘줄의 탄력”, “허기만큼의 높이”, “삶의 게릴라같은 표현은 그의 글이 모두 철저하게 온몸을 통과하여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에 나오는 온몸의 시학, 가족 공동체와 같은 연대의식, 운명과 싸우는 혁명의 자세, 이 세 가지의 힘줄이 그의 시를 이루는 근육이라 할 수 있겠다.

 

1

80년대 초 연세문학회에는 성석제, 원재길, 김태연, 김주일, 공지영, 박래군, 기형도, 우상호, 고영범, 문계봉, 나희덕 등이 모여 금요일마다 합평회를 하고, 술잔을 나누며 밤을 밝히곤 했다. 군복 상의를 자주 입었던 그는 1985년 당시 연세문학회 회장을 했었다. 영화배우 이소룡을 닮은 날렵하고 세련된 얼굴에 그의 형색은 낭패도 모르는/ 기다림 속에서 든든하게 무장된/삶의 게릴라바로 그 모습이었다. 거친 야생마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는 무척 따스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주도하기보다는 먼저 경청하려고 애쓴다. 그의 시는 그런 넉넉함이 묻어 있다.


문학회에서 합평회를 할 때나 그가 발표한 시를 보면 늘 저편에 외로 서 있는 갈매나무 보듯 그윽했다. 삼십년 전부터 그의 시를 읽으면 왠지 새로 태어난 신동엽 시인의 신작시를 대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1995년 계간 실천문학여름호에 실린 등단작을 읽을 때도, 넉넉하고 깊고 길게 흐르는 금강이 떠오르고 했다. 그 편안함 속에 가끔 탄력만큼이나 고집스런 그의 힘줄이 엿보이곤 했다.


책을 내야하고 낼 수밖에 없는 글쟁이라는 판단이 서면 나는 집요하게 괴롭힌다. 당연히 그를 괴롭혀 왔다. 만날 때마다, 통화할 때마다, 문자할 때마다 언제 시집 내냐고 괴롭혀 왔다. 등단한 지 스무 해를 넘겨 드디어 그가 시집을 낸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랫동안 은둔해 있던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이 시집은 말해준다. 학창시절 데모가 일어나면 묵묵히 앞장 서 나갔던 그는 이후 현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90년대 내내 인천지역을 기반으로 노동운동을 해왔던 그는 2014년부터는 3년 동안 한국작가회의 인천지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진보적 문화예술운동단체인 인천민예총상임이사로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고 있다.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다른 사람에 대해 쓴 듯싶은 아래 시가 대변해주는 것 같다.

 

그는 결코 유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논쟁의 자리에서 그는

빈틈없는 이론가였고

거리에서는 냉철한 사령관이었다

그의 목소리 높낮이에 따라

토론의 성과가 조정되었고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돌과 불꽃이 날아갔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비틀거린다

겹겹으로 봉쇄된 전선을 능숙하게 돌파하던 그가

생활의 공격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문건을 쓰고 구호를 외치던 손으로

세차를 하고 우유를 배달하고 운전을 하지만

생활은 그에게 낯선 전선이다.-그는 더 이상 진보적 잡지를 읽지 않는다에서

 

첫 연은 그의 자화상일까. 등단작이었던 이 시는 시인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세차를 하고 우유 배달하며, 대리운전 등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젊은 시절 운동을 했던 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낯선 전선이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진보적 잡지를 읽지 않는다는 제목은 그의 선배 기형도 시인이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 쳐야 한다”(우리 동네 목사님)는 말과 겹친다. “생활의 마디마디/굵고 완강한 괄호를 벗겨내”(다시 잠 못 드는 밤에)겠다는 삶도 실은 레닌의 것만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삶일 것이다. 종이에 적힌 관념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낯선 전선이 삶의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이다.

 

이 시집의 1부는 역사 변혁에 참여했던 여러 군상들을 그린 시편이다. 그는 모자 위 눈을 털며 숙소의 불을 켜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다시 잠 못 드는 밤에)을 호명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결사의 실천을 경주하는”(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체 게바라를 불러낸다. 암담하고 지루하고 잔혹한 시대에 그는 적을 비판하기보다 대부분 함께 했던 어진 이들을 그리워한다. “해지는 인천에서/해 뜨는 강릉으로/ 친구 보러 가는 길”( 면회.2), “돌아오는 동료들의 잠든 이마 위로/ 가장 밝은 광주의 밤별 하나 반짝 내려와 박힌다”(그리움 뒤에는 무엇이 남는가) , 특히 도둑처럼 찾아든 그 매정한 물결 너머로 부표처럼 떠다니는 너희의 마지막 웃음소리”(진혼곡조)로 상징되는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연작시 「, 이 두려운, 4, 그날, 광화문 광장 예술가 텐트촌에서등은 그가 바라는 것이 싸움 이전에 애도와 사랑의 회복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관념적인 구호나 이념이 아니라, 생생한 삶을 드러낸다. 그 삶이 늘 사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시집 후반부인 34부의 시들에서 잘 볼 수 있다.

 

2

백석이 머리칼을 날리며 광화문에 나타나면 네거리가 온통 환해졌다.”고 회상한 김기림의 말을 빌리자면, 말수 적은 문계봉이 나타나면 은은하게 따스한 온돌방에 함께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방금 따스하다고 썼는데 배려로 가득한 그의 삶처럼 그의 시도 따스하다.

 

그때 내 맘에도

많은 빛들이 살았지

내 쪽에서 등을 진 빛

무심하게 방치한 빛

감당하지 못하자

스스로 나를 떠난 빛

잃은 빛과 잊힌 빛

나를 떠난 빛 사이에서
자주 현기증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은 채

나와 함께 빛나온

대견하고 고마운 빛

무뎌진 그리움일망정

끝끝내 지키고 싶은

결코 잃어서도 안 되고

잊을 수도 없는 빛

또는 빚, 당신-너무 늦은 연서(戀書)

 

많은 이들이 그를 떠났지만 단 한 번도 나를 떠나지 않은 채그와 함께 빛나온 대견하고 고마운 빛은 무엇일까. “결코 잃어서도 안 되고/잊을 수도 없는 빛은 빚으로 환치(換置)된다. 빛의 고마움은 그가 스스로 빛으로 살아 다른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인 것이다. 이 시는 이 시집 전체를 감싸는 주제로 다가온다. 그는 빛으로 사는 빚을 지고 사는 시인이다.


특히 힘내요 태인 씨라는 부제가 달린 연작시가 모인 3부도 따스하다. 태인 씨는 무척 연로(年老)한 인물인 듯싶다. 또한 태인 씨가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 갈 때 슬리퍼 신다가 넘어질까걱정하는 것으로 봐서 그와 함께 한 집에서 지내는 인물이다.

 

늦은 밤 귀가해 태인 씨의 숨소리를 한참 동안 곁에 앉아 듣고 있다가 목욕탕 문을 열고 슬리퍼를 살짝 돌려놓습니다. 태인 씨,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 갈 때 슬리퍼 신다가 넘어질까 봐 신기 편한 방향으로 돌려놓은 거지요. 슬리퍼도 순종하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창문 앞을 서성이던 겨울바람도 눈인사를 보내며 숨을 고릅니다. 앞이 막힌 슬리퍼의 여백 속으로는 모자(母子)의 마음 같은 고요 한 줌이 살짝 들어가 잠을 청합니다. 냉장고의 숨소리가 유난히 큰 밤입니다.- 슬리퍼- 힘내요 태인 씨전문.

 

순종하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슬리퍼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푸른 나이를 온통 불의에 항거하며 문건 쓰고 구호를 외치던 희생양들은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다. 분노하며 살아온 그도 이제 쉰 살을 넘겨 시인의 자리를 찾아간다. “앞이 막힌 슬리퍼의 여백 속으로 모자의 마음 같은 고요 한 줌이 살짝 들어가 잠을 청한다는 구절은 이 시에서 가장 따순 아랫목이다. 모자(母子)라는 단어가 있어 태인 씨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머니를 "태인 씨"라고 한 것은 개인의 어머니에게서 모두의 어머니로 의미를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태인 씨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읽으면, 슬리퍼를 살짝 돌려놓는 마음에 독자도 자신의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다. “계절이 바뀔 때면/파킨슨병 태인 씨의 오른손은/갈피를 잃고 제멋대로 부산”(저울)하여 시인은 더욱 불안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노인의 건강을 헤아려 화자는 화장실 슬리퍼를 살짝 돌려놓는다. 어둡고 조용한 심야에는 옆방 숨소리가 들릴 만큼 화자의 귀는 밝아진다. 좀체 잠 못 이룬다는 표현을 냉장고의 숨소리가 유난히 큰 밤이라고 하며 마무리 한다. 그의 다른 시에 나오는 오래 전 아들 같은 아들이 되어”(가을 앞에서)라는 구절도 어머니 마음에 어긋나지 않게 살겠다는 절실한 표현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사랑을 따스하게 담은 시로는 함민복의 시 눈물은 왜 짠가가 잘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설렁탕이 든 투가리가 부딪치는 순간으로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문계봉의 슬리퍼는 겨울날 화장실 슬리퍼를 돌려놓는 순간으로 절절한 사모곡을 표현하고 있다. 명작은 눈시울 막 뜨거워지려 할 참에 바로 끝내버리는데,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나 문계봉의 슬리퍼는 눈시울이 흔들리려 할 때 끝난다.


나는 오래 전 아들 같은 아들이 되어/ 흐드러진 꽃 사이를 함께 걸으며/맑디맑은 태인 씨 웃음소리를/자꾸만 듣고 또 듣고 싶어요”(가을 앞에서)라는 사모곡은 얼마나 절절한가.

 

3

프라하에서 태어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시는 편지를 쓴 듯한 서간체가 많다. 그의 대표작 가을날도 서간체로 읽힌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릴케의 작품에는 체코 민족운동에 참여한 흔적이 보인다. 릴케는 단편소설 두 프라하 이야기에 조직운동을 하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아프게 기록해 놓았다.


릴케를 인용하는 까닭은 문계봉의 시를 읽을 때 릴케와 비슷한 간절한 종교성이나 내면의 역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야만적인 현실에 저항했던 문계봉의 시가 마치 릴케의 편지처럼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4부의 시에는 운유당(暈遊堂) 서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습니다체로 쓴 그의 서간체 산문시는 정겹고 따스하다. 또한 산문시는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간절하게 응시하게 한다. 손으로 쓰는 편지가 사라진 시대에 종이 편지 한 편 한 편 아프게 읽은 기분이다. ‘운유당은 어디일까. 운유당에는 시인이 위로하고 싶고, 시인이 다가가고 싶은 어떤 대상이 머물고 있는 상상의 공간이 아닐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후 두 시쯤에 내리는 비나

늦은 귀갓길에 만나는 바람 앞에서도

나는 결코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일제히 피는

붉고 노란 꽃들을 보면서도

나는 결코 당신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난 무척 용기 있는 사람이어서

아지랑이 봄 들판에 혼자 있어도

도대체 불안할 일이 무에 있을까요.

봄꽃이 당신의 목소리로 말 걸어 와도

도대체 그리울 일이 무에 있을까요.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만우절운유당(暈遊堂) 서신(書信)」 전문

 

이 시는 한 번이 아니라 두어 번 읽어야 제 맛이 난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일제히 피는/붉고 노란 꽃들을 보면서도/나는 결코 당신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웬지 입가에 웃음이 돈다. “봄꽃이 당신의 목소리로 말 걸어 와도/도대체 그리울 일이 무에 있을까요라는 표현도 독특하게 비틀려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라고 하며, ‘않다라는 부정어가 3번 등장하지만, 만우절이라는 제목 때문에 오히려 더욱 역설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시로 보인다. 시에 나오는 '그대''당신'은 일차적으로 시적 모티브를 제공한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만해 한용운의 시에서처럼 특정한 대상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을 호명하는 것으로 읽힌다. 읽다보면 시큰한 문장이 적지 않다. 시인의 무의식이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총체는 독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일 수도 있겠다. 대상이 누구이든 연시(戀詩)인 것만은 틀림없다.

 

독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문계봉의 시는 낭송하면 더욱 신선한 울림을 준다. 그의 시집 전체를 두 번 읽자 이상하게 겸허해졌다. 어리광 부려볼 데 없이 그의 시들은 대부분 경건하다. 시집을 읽으면 사랑을 기도하는 근육에 힘이 붙는 듯 했다. 그의 시는 날랜 솜씨를 오래 끓인 누룽지 맛에 숨기고 있다. 그 누룽지 맛에는 군중 속의 고독도 어려 있다. 지난 세월과 일상생활 그리고 가족 공동체와 보이지 않는 그대에게 무한한 사랑을 호소하는 시인이 문계봉이다. “나의 위로는 언제나, 분주한 저녁 해의 발걸음보다 조금 빠르게, 당신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흐리고 불안한 저녁)는다는 그의 마음은 시집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집을 진솔하고 검박한 연시집으로 읽었다.


크낙하면서도 나지막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는 현실 문제에도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연대해 왔을 것이다. 기다리던 첫시집이 나와, 올해 겨울엔 한 줌의 따스함을 나눌 수 있겠으나, 벌써 나는 두 번째 시집을 재촉할 거 같다. 시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모든 상처를 회통(回通)하며 널리 널리 퍼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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