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무심하게 흐르는 여름의 날들 (07-10-월, 새벽에 비) 본문
새벽에 세차게 장맛비 내렸다. 가끔 잠이 안 올 때 유튜브에서 수면 유도 영상으로 편집된 빗소리를 찾아 들으며 잠을 청한다. 오늘 새벽 빗소리는 실제 빗소리인지 유튜브의 빗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에어컨을 켜고 자다가 새벽에 빗소리를 듣고 에어컨을 껐다. 창문을 열자 한 옥타브 더 올라간 빗소리가 방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 새벽, 불행하게도 나는 단 한 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 어제 낮에 낮잠을 잤고, 저녁 후에는 책을 읽으며 블랙커피 한 잔을 마셨는데, 그것이 이렇듯 집요하고 철저하게 나의 잠을 빼앗아 갈 줄은 정말 몰랐다. 2시가 되어도 잠이 안 와서 한유주의 소설집 『연대기』(문학과지성사)를 읽기 시작했다. 단편 「그해 여름 우리는」과 「일곱 명의 동명이인들과 각자의 순간들」 등 2편을 읽었을 때 이미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자야 한다는 강박으로 불을 끄고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헛수고였다. 허다한 잡생각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일제히 밀려와서 아우성쳤다. 뒤척이면서도 ‘이러다 정말 잠 한숨 못 자고 출근하게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 생각은 적중했다. 7시까지 베개에 머리를 박고 잠을 청해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당연히 아침 운동도 못 했다. 거리로 나오니 현기증이 났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내내 쿠션 좋은 침대 위를 걷는 것 같이 허청허청 걸었다. 그나마 덥지 않아 다행이었다.❚그런데 희한한 건, 비록 사무실 의자에 앉아 두어 차례 꾸벅꾸벅 졸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하루를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복 16시간이 지나도 허기가 그리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새벽까지 장례식장에서 밤새고 온 보운 형이 점심을 거르겠다고 해서 나 역시 점심을 거른 것인데, 16시간을 넘겨도 참을 만하니 앞으로 18:6 단식으로 업그레이드해도 될 것 같다. 교육감이 몽골로 출장을 떠난 탓에 비서실은 한가했다.❚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빠르거나 더디다. 시간과의 관계가 대체로 원만한 사람의 시간은, 그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기지개를 켜는 속도, 혹은 양치를 하거나 신문을 들고 모닝 커피를 마시며 가끔 시계를 보는 속도와 비슷하게 흐른다. 시간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시간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의 시간은 전자레인지 안에서 즉석밥이 익는 시간이나 금리 낮은 은행의 이자로 부자가 되는 시간과 비슷한 속도로 흐른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사람, 시간을 제 편에 두고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의 시간은 일종의 권력이다. 내 여름날의 시간은 더디 흐른다. 나는 시간과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나? 나를 싫어하는 시간은 가끔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자꾸만 생각나게 하거나 어느 날 덜컥 늙어버린 모습을 확인하게 하며 키득거린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동안 충분히 힘들었고 이미 많이 지쳐있기 때문에 짓궂은 시간과 척질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여름을 온전히 견뎌 보임으로써 시간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했으면 하는데,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변검의 주인공처럼 얼굴이 많은 시간은 아직 나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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