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예술회관 야외무대에서 달을 보며 술 마시다 본문
늦봄의 저녁 바람은 왜 사람을 설레게 하는가. 퇴근 무렵 혁재는 전화를 걸어 대뜸 “형, 복어회 드실래요? 아니면 형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보세요.”라고 물었다. 로미와 함께 있는 게 분명했다. 돈 없는 거리의 가수가 나에게 복어회를 사줄 형편이 될 리가 없었을 테니. 나는 사실 복어회를 먹어 본 적이 두어 번인 가밖에 없다. 인상적인 맛이었다면 한 번만 먹어봤어도 기억이 날 텐데 그렇지 않을 걸 보면 내가 좋아하는 다른 생선회, 이를테면 민어나 돔, 참치 등과 비교해서 특출 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값은 무척 비쌌는데, 그건 맛 때문이라기보다는 희소가치 때문일 것이다. 독이 든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데는 그만한 기술이 필요할 것이고 그 기술에는 응당 대가가 따라야 하는 법이니.
나는 선택 장애를 앓는 사람답게 “글쎄,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복어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기대되긴 하는데, 가성비가 낮은 생선이잖아.”라고 말했다. 혁재도 “그건 그렇지요.” 하더니, “그럼 형 참치 드실래요?” 하고 다시 물었다. 참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비싼 복어를 ‘얻어먹는 것’보다 마음의 부담도 덜하고 혁재 또한 참치를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 그러자. 참치 좋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약속이 잡혀 구월동 밴댕이 골목 끝자락에 있는 참치 집에서 혁재와 로미 커플을 만났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도착하고 두어 팀이 더 들어왔다. 로미 씨는 새롭게 보험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며 한화생명보험 매니저 명함과 고급 볼펜 세트를 나에게 주었다. 아이패드를 꺼내 이것저것 보여주며 나의 인적 사항을 묻기도 했다. 지난주 로미 씨가 “베짱이 애인과 연애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일’이 어쩌면 보험 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 6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참치 집에 들어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근처에 스튜디오가 있는 사진작가 R과 그의 제자(라고 R이 주장하는 여성)가 들어와 우리와 반대편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아는 체를 했으나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진 않았다. 그는 아마도 나와 무척 친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우리 사이를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사업방식과 작업 과정에서 탐욕과 위선을 봤기 때문이다. 순정하지 않은 예술가를 나는 경멸하는데, 그의 위선과 탐욕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인지, 예술에 대한 빗나간 열정인지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다. 작업은 무척 꼼꼼해서 판단이 쉽지 않다. 아무튼!
어둑어둑해질 때쯤에는 은준에게도 전화가 왔다. 혁재와 로미 씨의 동의를 얻어 합석을 시켰는데, 도착했을 때 보니 이미 취해있었다. 역시 말 많은 은준이가 합류하자 술판의 분위기는 이내 달라졌다. 다만 그 달라진 분위기를 모두가 좋아한 것은 아니다. 혁재와 은준이는 친구 사이이지만 스타일과 취향이 너무도 달라 종종 술판에서 부딪치곤 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한 두 후배의 주사, 이를테면 혁재의 황당한 운명론과 은준이의 장광설이 부딪쳤다. 그럴 때 그들은 서로를 무척이나 못 견뎌하는데, 특히 술 깨면 잊고 마는 혁재와는 달리 은준이의 팩트 공격은 집요한 편이어서 상처는 혁재가 더 많이 입는 편이다.
참치 집을 나와 밴댕이 골목을 걸어가는 내내 혁재는 무척 흥분된 상태로 소리를 질렀고, 은준이는 계속해서 혁재 뒤를 따라가며 “에이, 바보 같은 놈아!” 하며 혁재의 어리석음(은준이 판단하는)을 지적해댔다. 앞으로는 서로 절대 보지 말자며 투덕대는 그들을 나는 뒤따라가며 말리고…… 용궁정 앞을 지날 때 사장인 종화 형이 ‘또 너희들이냐?’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악수를 청해왔다. 나도 웃었다. 잠시 후면 서로 잔을 권하며 “오, 내 친구!” 할 놈들이 그 무슨 허튼짓들인지.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예술회관 앞까지 오는 내내 간신히 둘을 다독거린 후, 나는 후배들에게 “봄이 다 가기 전에 예술회관 야외무대에서 달을 보며 노천 음주 한 번 해보자.”라고 제안했다. 혁재는 이내 표정이 환해지며 갈매기로 달려가 막걸리 다섯 병을 가지고 왔다. 은준이에게는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과자와 물을 사 오라고 시켰다. 그렇게 술과 물과 과자를 챙겨 들고서 우리는 예술회관 야외무대에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달도 예쁘게 떠서 우리를 내려다봤다. 바람도 시원하고 운치도 있고, 사람도 별로 없어 술 마시기 제격이었다. 가끔 연인들이 찾아와 계단에 앉아 소곤거리다 가곤 했다. 화장실도 가까워 술집보다 여러모로 나았다. 시멘트 바닥이라서 깔고 앉을 게 없었으면 엉덩이가 시렸을 텐데, 잠시 화장실 다녀오겠다던 혁재가 도착했을 때, 그의 손에는 뽁뽁이 비닐과 두툼한 상자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역시, 혁재!”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근처 가구점 앞에 가니 쓸 만한 게 제법 있더라고요.” 신의 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우발적인 봄밤의 노천 술자리가 아름답게 (지극히 내 주관적 판단이지만) 펼쳐졌다. 카메라를 꺼내 달을 찍었는데, 낮처럼 환하게 나왔다. 내가 원한 사진은 이런 게 아닌데, 성능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다. 조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신기술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간에 로미 씨는 먼저 들어가고 남자 셋이 남아서 막걸리 다섯 병을 모두 비웠다. 취기도 별로 없고, 기분은 좋고, 두 녀석도 다시 호호 하하거리며 술잔을 주고받고, 달도 계속 우리와 함께 취해가던, 늦봄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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