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청학동 회동(실내 포장마차 '청해') 본문
오랜만에 사진작가 건환 형을 만나고 왔다. 형이 사는 집 근처 실내포장마차(‘청해’)에서 부평아트센터 황모 팀장과 함께 만났는데, 이 술집에서는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심지어 사장 아주머니의 얼굴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술집 이력을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청해’가 허름한 포장마차 시절이었을 때, 나는 이미 친구들과 서너 차례 ‘청해’를 찾은 적이 있었던 거다. 당시에도 안주가 맛있어 문전성시였는데, 장사가 잘돼 이곳으로 확장 이전한 모양이었다.
오늘 건환 형은 황과 나에게 최근 발간한 작품집을 건네주었는데, 이 작품집의 서문을 내가 써주었기 때문인지 책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고집스레 옛날 사진관에서나 볼 수 있는 차광막이 있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서 사진을 찍는 형은 사진계에선 ‘괴물’ 소리를 듣는 작가다. 나는 그 고집스러움이 너무 좋다.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담을 때까지 흡사 매복한 저격수처럼 렌즈 너머 풍경과 피사체를 응시하는 형의 모습을 상상하면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이번 작품과 작품집은 뉴욕에까지 소개될 거라고 하는데, 그래서였을까 책장을 펼쳐보니 내가 쓴 글 또한 한글 원문과 영역된 글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황은 책을 받자마자 “문 선배님 글부터 읽어볼래요.” 하며 책장을 펼치고 읽어내려갔다. 그러다가 어려운 단어, 이를테면 ‘도저한’과 같은 표현이 나오면 무슨 뜻이냐고 물어왔다. 한예종 출신에 유학파인 황이 모를 정도로 난해한 단어를 사용했다면, 나의 글에는 여전히 먹물이 많이 배어 있는 셈이다. 쉬운 단어로도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식자들의 허영심이 글을 어렵게 만든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일수록 그들 내부에서 사용하는 문장은 무척 폐쇄적이다. 자신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단어들이 부지기수다. 법조인의 글이 그렇고, 젠체하는 인문학자나 평론가의 글들이 그렇다. 범인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왜곡된 신념, 욕지기가 나오는 선민의식의 발로다.
술이 들어갈수록 화제는 ‘사랑과 연애’로 귀결되었다. 세 사람 모두 혼자 사는 싱글족이니 당연한 일이었을까. 두 사람은 이혼남이고 한 사람은 노처녀, 참 구색도 잘 맞추었다. 건환 형은 “계봉아, 나는 계속 애인은 있었어. 너랑 달라.” 하며 나와 선을 그었고, 황은 “선배님은 왜 연애 안 하세요?”라고 물으며 아픈 곳을 콕콕 찔러댔지만(‘왜 못하세요’라고 묻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혼자 지내는 것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을뿐더러 크게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황 역시 “저도 그래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건환 형과 나는 ‘설마 그럴 리가. 우리는 이미 너의 화려한 연애 이력을 알고 있는데……’ 하는 표정으로 쿡쿡 웃었다.
이런 나의 감정 상태에 대해 주변에서는 ‘연애 세포가 말라 죽었다’라고 말들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사랑’에 대한 로망은 지니고 있다. 어찌 아담의 후예로서 사랑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있겠는가. 다만 때가 아닐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때’라는 것은 내 가슴을 격동시킬 상대를 못 만났거나 비록 만났다 해도 나와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상대이어서 지레 포기해 버리는 마음과 관련이 있긴 하겠지만…….
아무튼 사흘째 이어지는 술자리라서 많이 피곤하긴 했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만난 자리라서 그런지 기분은 유쾌했다. 황이 카카오택시를 불러주어 편하게 왔다. 결제 역시 휴대전화 어플로 그녀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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