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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예정되지 않은 만남들, 그리고 어리굴젓 본문

일상

예정되지 않은 만남들, 그리고 어리굴젓

달빛사랑 2021. 4. 8. 01:18

 

 

오랜만에 먼지 없이 좋은 날씨였다. 빨래하고 반찬 만들고 (그래 봐야 국 끓이고 김치 썰어놓고 햄 구워놓는 거지만) 룰루랄라 종일 영화 보고 잠만 잤다. 완벽하게 행복했다. ‘이렇게 이완된 채 생활해도 좋은 걸까.’ 잠깐 생각했지만, 조급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아등바등 해봐야 거기서 거기더라. 내 몫으로 허락된 시간을 내 맘대로 요리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나는 집중력이 있으니 뭔가 할 일이 닥치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이뤄내면 될 일이다. 당겨서 고민한다고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면 미리 답답할 필요가 무에 있는가. 정신적 스트레스만 배가될 뿐이다. 해결될 일들은 해결되게 마련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물 <이세계(異世界)는 스마트폰과 함께>, <제로에서 시작하는 마법의 서> 두 편을 정주행했다. 전자와 후자 모두 12부작. 볼 때마다 느끼는데 일본의 만화 정서는 확실히 우리와는 다르다. 세계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 그 깊이와는 무관하게 일본의 경우 무척 다채롭다. 귀신과 혼령의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인가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는 이세계(귀신이나 혼령이 등장하거나 마법이 통용되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다룬 작품이 무척 많다. 상상력의 결이 우리와는 매우 달라서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보았던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거에 대하여>라는 애니도 무척 재밌게 봤는데, 이 애니 역시 이세계(異世界)를 다룬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과 권력의 속성, 사회 안에서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며 상호 협력 혹은 대립하는가 등, 절대 만만하지 않은 주제들을 함축하고 있다. 도깨비나 처녀 귀신, 옥황상제와 신선을 다룬 우리나라 작품과는 확실히 다르다. 한국 애니 중에도 <머털도사>나 최근 작품인 <신비아파트> 시리즈, 좀비물인 <서울역> 등이 있지만 일본의 애니에는 댈 게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일본 애니는 마약 같다.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 다행히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은 까닭에 마약의 해악이 그리 반사회적으로 발현되지는 않겠지만.

 

 

 

 

오후에는 갈매기 사장님으로부터 손님이 하나도 없다는 연락을 받고 갈매기에 들렀다. 썰렁하긴 했다. 나 포함해 창가에 한 팀, 안쪽 별실에 한 팀 총 세 테이블뿐이었다. 막걸리 두 병만 마시고 올 생각이었는데, 두 병째 마시고 있을 즈음 유 모 박사가 등장했고, 잠시 후에는 경평 형, 학운 형 등 선배들이 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을 보고 왔다며 왁자지껄하게 등장했다. 심지어 창가에 있던 손님 중 아는 후배는 “형님, 제가 한 잔 올릴게요.” 하며 내 자리에 잠깐 합석했다. 말이 많은 친구라서 ‘아이코! 일찍 가긴 틀렸군’ 하고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제주에 있던 바람이와 혁재가 들어왔다. 전작이 있는 눈치였다. 약속 없이 찾은 갈매기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니, 이게 ‘참새방앗간’의 효과인가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반갑긴 했지만, 9시가 다 되어 들어왔기 때문에 어차피 갈매기에서는 한 시간밖에 함께 할 수 없는 일, 그래서 집약적으로(?) 술을 마셨다. 취기가 돌았다. 10시 5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니 형수가 “문 시인, 이거 가져가요.” 하면서 어리굴젓 한 통을 챙겨주었다. “우와, 고마워요. 내가 좋아하는 젓갈이라니.” 진심으로 감동하며 갈매기를 나왔다. 혁재와 바람이는 함께 나왔고 유 박사는 좀 더 있다가 종우 형과 함께 퇴근하겠다고 술집에 남았다. 혁재와 바람이는 한 잔 더하고 싶어 했다. 혁재는 “형네 집 가서 한 잔 더할까요?” 했지만, 나는 내일 아침 출근을 핑계로 단호하게 말했다. “나 취했어.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해서 그만 마실래.” 서운하게 생각했으려나. 서운해도 할 수 없지. 화단 모서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바람이가 지하철 승강기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머리 위로 손 하트를 만들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며 환하게 웃었다. 집에 와서 풀어보니 어리굴젓 양이 제법 많았다. 확실히 형보다 형수님의 손이 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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