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꽃샘 한파ㅣ후배를 위한 고언 (苦言) 본문
꽃이 필 기미도 없는데 꽃샘이라니, 절기상 입춘이 지난 지 보름이나 지났으니 이제 겨울은 계절 안에 풀어놓았던 자신의 지분을 하나둘 챙겨서 물러갈 준비를 해도 될 텐데, 미련도 이런 미련이 없는 듯 보입니다. 어제부터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 게다가 바람까지 극성이라 체감온도는 영하 16도라고 하는군요. 하긴 겨울은 으레 이맘때면 몽니를 부려야만 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나마 사흘 정도 춥다가 나흘째인 금요일부터는 기온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던 삼한사온의 리듬을 되찾은 것 같아서 겨울다워 보이긴 합니다. 겨울은 모름지기 겨울다워야 하잖아요. 그동안 너무 겨울답지 않은 겨울을 만나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이 정도 추위는 오히려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계절의 산뜻함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한파가 찾아올 때는 미세먼지가 사라지더군요. 따뜻하고 미세먼지 가득한 날씨보다는 다소 추워도 깨끗한 바람이 부는 날이 나는 좋습니다.
오늘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보좌관들과 과거의 추억을 하나둘 나눴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고드름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을 바라보던 일, 불장난하다가 양말을 태워 먹은 일, 쥐불놀이하다가 불낼뻔한 일 등등 연배가 비슷한 보좌관들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웃고 공감하며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간절하게 나더군요.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왜 엄마와 관련된 추억들은 하나같이 물기에 젖은 채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주었을까요. 오히려 슬픔을 더 많이 안겨주진 않았을까요. 드린 기쁨과 떠안긴 슬픔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면 엄마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슬픔만 새카맣게 남아있을 것 같아 아득합니다. 다만 그때 엄마는 젊었고 힘이 있었고 슬픔 따위를 아침에 잠시 만나는 이슬처럼 여길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내가 안긴 아픔이 너무 크기에 ‘그때 엄마는 그렇지 않았을 거야’라거나 ‘엄마는 그때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야.’라는 식으로 합리화하고 싶어져요. 그때는 모든 엄마가 다 그랬었다고, 우리 엄마가 당대 엄마들이 겪고 있던 평균치의 고통 그 이상을 겪은 건 아니라고 자꾸만 합리화하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얼마 전 출간한 후배의 소설을 읽다가 중간에 덮었습니다. 앞부분은 그런대로 애정을 가지고 읽어 나갔습니다. 물론 앞부분에도 여성에 대한 잘못된 성인식이 드러난 부분이 자주 눈에 띄어 읽기 거북했지만, 뭔가 스토리라인상 필요하기 때문에 배치한 소설적 장치(표현)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는데, 중간쯤에서 이야기가 널뛰더니 중후반으로 갈수록 도무지 이야기의 개연성을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견해이고 나의 소설 독법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판타지 요소도 있지만 그렇다고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현실 노동에 대한 핍진한 묘사와 냉소가 드러나지만 그렇다고 풍자적 사실주의 소설도 아니고…… 백 번 양보해서, 퓨전 소설이라고 치더라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냉소적인 블랙 유머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풍자 효과보다는 작품의 질을 깎아 먹기 일쑤였습니다. 자신의 광범위한 독서량과 팝이나 클래식에 대한 지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부분도 많았지만, 그것들이 작품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랑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후배는 걸쭉한 입담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소설가에게 크나큰 장점입니다. 다만 주제가 불분명하거나 주제는 명증하나 그것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그건 한낱 재담으로 전락할 위험이 농후합니다.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의 형국이라 하겠습니다. 사랑과 의리로 완독하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66% 지점에서 책을 덮었습니다. 확실히 그가 평상시에 사람들이나 사회적 현안을 대하면서 보여온 냉소적 태도가 그의 작품 속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더군요. 소설가로서 그는 많은 장점이 있는, 명민한 작가입니다만 그가 삶과 사람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회복하지 못할 경우 그의 소설은 동일한 문제를 노정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해당 소설의 완결성 문제보다 전술한 이 문제가 더욱 아프게 다가오더군요. 하지만 그는 명민한 소설가라서 분명 이 개미지옥 소설 쓰기의 한계를 극복할 거라 믿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나의 느낌과 감상을 후배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후배는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화를 낼까요?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평에 관해 무척 민감하거든요. 지인의 작품읽기가 곱절로 어려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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