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방 정리를 하다 본문
방을 정리했다. 밖에는 싸락눈으로 시작한 눈이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고 있었다. 90년의 삶이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적었지만 막상 엄마의 짐이 빠진 공간은 나의 짐을 쑥쑥 잘도 받아들였다. 엄마의 옷이 걸려 있던 옷걸이에는 나의 옷이 걸리고, 엄마의 이불을 넣었던 장롱에는 내 이불과 베개가 자릴 잡았다. 상대적으로 내 침실의 공간은 보기 좋게 넓어졌다. 버리기도 많이 버리고 엄마 방으로 옮기기도 많이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방 정리를 하는 데만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오전에 시작한 일이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내 방의 서랍장을 열어보니 버리기는 아깝지만 입을 일이 결코 없을 옷들이 가득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을 정리했다. 그리고 빈 서랍장 중 하나를 엄마 방으로 옮겨 놨다. 내 방이 갑자기 운동장 만해졌다. 보기에 좋았다. 뭔가를 들이는 기쁨만은 못하겠지만 이렇듯 인연이 다한 물건이나 옷가지를 버리는 것도 묘한 쾌감을 준다. 비우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비워 가벼워진 곳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만족감이 들어차는 일은 즐거운 역설이다.
백기완 선생의 빈소가 인천에도 마련되었다. 내일 보좌관들과 함께 들러볼 생각이다. 백 선생이 살아온 삶이 워낙 풍찬노숙 파란만장했기 때문일까 가시는 날의 날씨가 예사롭지 않다. 선생이 생전에 이루려했던 노나메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적폐들의 반동적 흐름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데, 화두만 던져놓고 미처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게 된 선생의 아쉬움이 날씨마저 얼어붙게 만든 것일까. 이제 1~2세대 민주인사들은 하나둘씩 하늘에 들고 있고, 그들의 피어린 헌신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앞선 이들의 희생과 헌신 때문에 이만큼의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이룰 수 있었다는 걸 그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남은 사람들의 몫이 그만큼 더 커졌다. 일모도원,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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