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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인천의 예술가(7)-서예가 이성촌 본문

리뷰

인천의 예술가(7)-서예가 이성촌

달빛사랑 2019. 10. 14. 00:03



 

 

그는 호()가 많은 서예가다. 동재(東齋)를 비롯해 연당(然堂), 팔음산방(八音山房), 백화산방(白華山房) 등 다양한 아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많은 호들 중 스승으로부터 받은 호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자신이 직접 지은 것들이다. 이름도 아명(兒名) 성근(聖根)과 열다섯 살 이후 사용한 성촌(省村) 등이 있다. 이렇듯 다양한 이름과 아호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그는 표현욕구가 강한 서예가이거나 예술적 정체(停滯)를 용납하지 못하는 진취적 성정의 서예가라고 생각된다.

 

그가 처음 서예를 배운 것은 어린 시절 조부로부터였지만 서예의 서법을 전수해 준 스승은 해인사 지주를 역임했던 불교계의 거목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스님이었다. 광주 이씨 19대 손으로서 여섯 살에 이미 천자문을 뗀 이성촌은 유년시절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등 한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한학이면 됐지, 무슨 놈의 신식교육이냐는 당대의 사회적 인식과는 달리 그의 부친은 배워야 된다. 신문화를 받아들여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남대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시작하려 했는데(당시 이사장이 최범술이었고 학장이 신익희였다) 불행하게도 교육에 대한 깨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부친이 일찍 작고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때 이성촌은 이사장인 최범술을 찾아가 학교 청소를 하는 대신 학자금 면제를 부탁하는 담판을 벌였고 결국 장학생으로 입학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것이 서예 스승 최범술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두 해전의 일이다.

 

한국전쟁 즈음해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졸업동기들과 함께 곧바로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했다. 처음 입대할 때는 당시로서는 드문 대학 졸업생이었기에 장교가 되는 걸로 알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들은 사병 군번을 받았다. 훈련소에서는 훈련과정이 끝날 무렵 시험을 실시했고 합격한 사람을 추려 광주보병학교로 보내 장교후보생 훈련을 시켰다. 그는 53년에 비로소 소위로 임관을 하여 수도사단 기갑연대인 최전방 맹호부대로 발령을 받았으며, 5.16발발 전까지 군 생활을 하다가 유학생 모집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고사포병으로 미국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1959년 중위 계급으로 인천에 내려왔고 대위로 진급할 때쯤 5.16이 발발했다. 그는 5.16군사정변 과정에서 구체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없었고 단지 명령을 받고 인천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다. 이후 부산으로 전보 갔던 그는 1962년 박정희 소장이 군복을 벗을 때 대위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인천에서 보세창고 관련 기업에 취직을 해서 3년 정도 새로운 인생을 살기도 했지만 회사 운영이 어려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서예학원[연당서예학원]이었다. 예술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오로지 호구지책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학원은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는 서예의 부흥기였기 때문에 그의 스승 송석 선생과 취정 이준구 선생 등 많은 서예가들이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편 군에 있을 때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예편 후 인천에 살면서 송석(松石) 정재흥(鄭載興)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사사를 받는 동시에 소강(小岡) 부달선(夫達善) 선생에게도 사사를 받는다. 두 스승으로부터 받은 사사의 연혁은 10년이 넘는 기간이었다.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선생에게도 배우고자 했지만 동정 선생은 얼마 후 작고하셔서 그의 문하에는 끝내 들지 못했다.

 

그는 여러 스승 중에서도 소강 부달선 선생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비로소 서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성촌은 운필법의 진수를 소강 선생에게 배웠다. 물론 송석 선생과 소강 선생은 나름대로의 운필법이 각각 있었지만, 이성촌은 두 스승의 글들을 임서(臨書)하면서 단지 그들의 운필법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종합적인 운필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격 도야의 과정과 다를 바 없었는데, 훌륭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해 그는 결국 음양의 이치, 밝음과 어둠, 굵고 가늚, 강하고 약한 것 등등을 조화해서 쓰는 법을 체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이성촌은 인천시전에 출품을 하여 초대작가가 되었고 1982년에는 인천미협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캐나다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서예와 역학공부 모두를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내가 병이 깊어 949월 다시 고국으로 나왔고 이듬해인 953, 아내와 사별했다.

 

당시 이성촌은 한국을 떠나면서 자신의 글과 자료들을 모두 누군가에게 줘버렸다고 한다. 다시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나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어딘가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작품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이후에 다시 붓을 들어 글을 쓰기도 했지만 주로 제자들의 작품에 대해 조언을 해주며 소일을 했다.

 

그는 한 번도 개인전을 개최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전시를 위해서는 금전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림의 경우는 문화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하고 완성된 작품이 매매가 되기도 하지만 서예는 구매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전시회를 한 번 하고 나면 빚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서예의 경우, “눈앞에서 금방 쭉쭉 한 장 써서 완성하는데, 그걸 뭐 돈을 받아?”라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 있었는데, 그런 상황을 자주 목도하면서 전시나 작품의 환금성에 대해 맘이 가질 않았던 것이다.

 

물론 동료나 제자 등 주변에서는 매번 전시를 종용하여 왔지만 만약 스승인 자신이 전시를 할 경우 제자들은 자신의 그림을 의무적으로 하나씩 팔아줄 게 분명한데 그런 부담을 제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이성촌의 작가적 성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동정 선생, 송석 선생, 소강 선생도 모두 행서와 초서를 즐겨 쓰셨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다소 어렵다는 이유로 행서와 초서는 하지 않고 전서와 예서, 해서에만 주로 매달리는 경향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했다. 이 대목 역시 그가 안정과 나타(懶惰)를 거부하는 진취적 작가 정신의 소유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라 하겠다.

 

이성촌은 인천 서예의 부흥기에 활동했던 기라성 같은 스승들로부터 사사를 받고 올곧게 서예가의 길을 걸어왔지만 개인적 사유와 사회적 분위기로 인하여 제대로 된 작가적 평가를 받지 못한, 자신을 포함한 대가들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강력히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인천 서예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존재 의의는 만만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동재 이성촌은, 단 한 차례의 전시회도 개최한 바 없고, 이민 과정에서 숱한 작품들이 그의 손을 떠나 다시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무게감으로 인천 서예계의 초석을 다진 든든한 어른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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