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짐승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2-3-월, 맑음) 본문
긴 연휴가 끝나고 오랜만에 출근했다. 집을 나올 때 날씨 상황을 확인했다. 최저기온 영하 6도, 최고 기온 영하 3도, 한낮의 기온이 영하라면 날씨가 꽤 쌀쌀하다는 말이어서 경량 패딩 대신 두꺼운 다운 패딩을 입었고 목도리를 했다. 비니와 장갑은 만약을 대비해 가방에 넣어두었다. 평소 같았으면 만수역부터 집 앞에 있는 문일여고 학생들의 롱패딩과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이 없는 거리가 낯설었다. 8시 40분에 시청역에 내렸는데, 빠른 걸음으로 종종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시청이나 교육청 직원들일 것이다.
오랜만에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김영철 선배는 보이지 않았고 보운 형만 혼자서 컴퓨터로 뉴스를 시청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거의 일주일 만에 출근했는데도 청의 내부 통신망인 ‘Ice-talk’에는 별다른 문자나 쪽지가 없었다. 하긴 나만 일주일 만에 출근한 게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운 형과 연휴 기간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후일담을 나눈 후, 비서실에 들러 직원들과 인사했다. 그러려고 들른 것은 아닌데, 내가 들어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약간 미안하고 민망했다. 나이 많은 선배에 대한 예우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꼰대가 아닌 이상 그런 모습을 좋아할 선배는 없다. 아니, 혹시 있으려나.
점심때쯤 남동희망공간 대표 유 아무개가 비서실장에게 교육청 대강당 사용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며 사무실에 들렀다. 유의 용무가 끝나고 유 대표와 보운 형, 나는 CGV 근처까지 내려가 오랜만에 어죽을 먹었다. 식당까지 가는데 얼굴이 아릴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아마도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더욱 춥게 느껴졌을 것이다. 날씨가 추운 날에는 매운탕이나 해장국집이 붐비는데, 아니나 다를까 1분만 늦었어도 자리를 잡지 못했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보운 형은 당뇨를 앓고 있으면서도 “오늘 같은 날은 이런 걸 먹어줘야 해”라며 이미 국수가 담긴 어죽 국물에 수제비를 떼어 넣고 나중에는 라면 사리(이 식당에서는 무한 리필) 2개를 가져와 그것까지 다 먹었다. 덕분에 혹은 그 탓에 나 역시 혈당 스파이크를 경험했을 것이다.
오후에는 은준이 전화해 한참 통화했다. 술 마시고 싶어 전화했겠지만, 형식적으로는 시국과 정치인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풀어놓기도 하고 몇몇 인물에 관해서는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그때마다 “새해가 됐는데 왜 이리 맘이 완악한 거야? 연민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 그리고 순정한 마음으로 습작(習作)이나 열심히 해”라고 말해주었다. 말을 하면서도 사실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특정 정치인들, 특히 국민의힘이나 윤 씨 부부에 대해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현실 정치가 국민의 마음을 날카롭게 만들고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짐승의 시간, 저주와 혐오가 만연한 미친 시절이 빨리 지나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퇴근하면서 혁재 어머니의 안부가 걱정 돼 혁재에게 전화했다. 만석동 작업실에서 병균, 로미와 술 마시고 있었다. 병균이는 정말 오랜만이라서 만석동에 들러 혁재가 사온 홍어회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8시쯤 장보러 동인천에 왔던 산 카페 대표 성식이가 혁재와 통화하던 중에 내가 만석동에 있다는 말을 듣고 더덕장아찌와 공부가주 한 병을 사 들고 작업실에 들렀다. 덕분에 집에 올 때는 성식이 차를 타고 편하게 왔다. 차를 타고 오며 차 값 대신 그의 연애 상담을 해주었다. 어제 연인 J와 심하게 다툰 후"서로 이렇게 안 맞을 바에는 깨끗하게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자"라고 선언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칼로 물을 베는 모양새다. "내일 J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나타나면 넌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로 돌아갈 거잖아?"라는 말에, 그는 "아니야, 형. 이번에는 진짜야"라고 다소 비장하게 말했으나 믿을 수 없었다. 집 앞에 도착했는데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한참 얘기하다 들어왔다. 그나저나 혼자 사는 내가 연애 상담을 해줄 자격이 있는 건가? 좀 우습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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