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한밤의 코미디 쇼 (12-4-수, 흐리고 맑음) 본문
어젯밤(12월 3일, 화요일) 자정이 얼추 된 시간에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사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유튜브를 틀어놓긴 했지만 10시쯤에 이미 침대에 올라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반수면 상태에서 아들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휴대전화 화면에 뜬 이름이 아들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들의 격한 목소리 들렸다.
“아빠, 뉴스 속보 봤어? 이 무슨 황당한 일인지 모르겠네요. 지금 팀 회식하다가 비상 소집령이 내려서 법원에 와 있어요. 정말 이런 상미친놈이 또 있을까요?”
인천지법에 근무하는 아들은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아들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유튜브 화면을 새로고침 했다. 그러자 각 방송사 채널마다 윤석열의 얼굴이 나오고 모든 화면마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라는 자막이 올라와 있었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제야 아들이 흥분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러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저건 자충수일 뿐 금방 해프닝으로 끝날 거야. 다만 이렇게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피곤하게 만든 것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언제가 되더라도 윤 부부는 감옥 가게 될 거야. 피곤할 텐데, 건강 잘 챙기고”라고 말해주었다. 아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21세기에 비상계엄이라니, 말이 돼요? 어이가 없어서” 하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
흥분한 아들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 방송 속보를 시청하다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고 황당하고 화가 나는 한편으로 뭔가 곤혹스러운 일을 손 안 대고 코 풀 듯 쉽게 해결할 수 있을 듯한 낙관적인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어나 뉴스를 보다가 출근 시간 지나서 아들에게 전화했다. “그것 봐, 아빠가 그랬잖아. 해프닝으로 끝날 거라고”라고 했더니, 아들 또한 “세 시간이 뭐야, 세 시간이. 어이가 없어서.”라며 키득댔다. 계엄선언에서 해제까지 걸린 시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아침에 일어나 부자간에 이렇게 키득댈 수 있도록 사태가 해결되어서 천만다행이다.
아무튼! 정말이지 이런 삼류 소극(笑劇)이 또 있을까? 수권 능력도 의지도 없는, 오로지 탐욕에 눈먼 부류에게 권력을 맡기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쉴 틀 없이 시전해 온 통(統)을 향해, 오래전 농담처럼 “통은 정신병자다”라고 외치면 인격 모독죄가 아니라 국가기밀 누설죄로 잡혀가려나? 이렇게나 버라이어티한 나라에서 현기증 없이 살고 있다니, 나 스스로 대견해 눈물 날 지경이다. 하물며 추운 새벽, 결연하게 국회로 몰려가 장갑차와 무장 계엄군을 온몸으로 제지한 용감한 국민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나저나 멍청이 통은 물론이고 통의 즐거움을 위해 앞다투어 호가호위한 권력의 개들과 가혹한 정치에 부역한 정치 검사들도 썩은 동아줄을 움켜쥔 채로 나처럼 꼬박 밤새웠을 거다. 자신들만의 닫힌사회 속 머저리들!(칼 포퍼 선생 죄송!)
밤에 큰누나가 명치 끝이 아프다면 나와 작은누나를 불렀다. 작은누나와 나는 얼마 전부터 그야말로 5분 대기조가 되어버렸다. 직장 다니는 작은누나에게는 무척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만나자마자 "내가 노는 사람이야? 그리고 막상 가 보면 아무 것도 아니야. 정신적인 문제라니까"라며 짜증부터 냈다. 맞는 말이었다. 큰누나는 지금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혼자 어떤 일을 처리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나와 작은누나의가 감당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많아졌다.
결국 누나를 데리고 다시 우리집에 왔다. 차 안에서 "다 죽어가더니 지금은 많이 나아졌나 봐요?" 했더니 "너희들하고 통화하고 나면 증상이 가라앉아" 하며 천진하게 웃었다. 나와 작은누나는 기가 막혔지만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작은누나가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면서 "앞으로는 어디 아프면 언니 자식들(나에게는 조카들)에게 연락해. 그래야 애들도 평소에 엄마에게 관심을 갖지"라고 말했다. 큰누나는 애들에게는 절대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속으로 누나의 그런 발상이 무척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걱정 끼치지 않고 싶고 형제들에게는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생각처럼 느껴졌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있다. 하물며 형제간에 이렇듯 5분 대기조처럼 '불려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면 당연히 형제끼리 서로 돕고 챙겨야 하겠지만, 요즘처럼 공주 혹은 애기 모드가 되버릴 때는 정말 피곤하고 짜증스럽다. 보호 받으면서 곱게 살아온 탓에 세상 물정 모르는 누나가 한편으로는 안쓰럽지만, 누나도 이제 매형 없는 세상에서 홀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으니 변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야박해 보이더라도 할 수 없다. 누나에게도 이제 홀로서기가 절대적으로 필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 목소리들'의 뒤편에서 (12-6-금) (0) | 2024.12.06 |
---|---|
인천민예총 창립 30주년 기념식 (12-5-목, 저녁에 비) (7) | 2024.12.05 |
밀린 숙제 하기 (12-3-화, 맑음) (2) | 2024.12.03 |
12월은 사랑만 가득하길 (12-2-월, 흐리고 비) (0) | 2024.12.02 |
12월의 첫날, 그리고 후배의 평론집 (12-1-일, 흐리고 비) (2) | 2024.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