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고독이 필요한 시간 (9-27-금, 맑음) 본문
요 며칠 의뢰받은 자서전 교정하느라 고생했더니 입술 주변에 물집이 잡혔다. 확실히 면역력이 떨어지니 이런 일이 잦다. 잠을 설치며 뭔가에 집중했다 하면 영락없이 입술 주변에 물집이 생긴다. 요즘 탄수화물 관리를 안 해서 더욱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60대의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좋고 나쁜 것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그 ‘정직한 반응’이 좋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아무튼 입술 주변이 볼썽사납다는 핑계로 집에 있기로 했다. 뭔가 집중했던 하나의 과제를 완수하고 나면 루틴처럼 술집에 들러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이번에는 피부 트러블을 핑계로 집에 있기로 했다. 내일 부평 풍물 축제에 가게 되면 지인들과 함께 술 마실 게 뻔하다는 사실도 집에 머물기로 한 이유 중 하나다.
어제 장(張)이 전화해서 흔한 안부를 묻고 말을 빙빙 돌리다 돈을 꿔달라고 했다. 어제가 카드 대금이 빠지는 날인데 깜빡 잊고 잔고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토요일에 반드시 돌려줄 것이고 그 이자로 술까지 사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60만 원은 큰 액수가 아니라서 알았다고 하고 바로 입금해 주었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 친구가 그날 돈이 어디서 생겨 갚겠다는 건지 궁금하긴 했다. 게다가 너무 자신 있게 ‘토요일’을 콕 집어 특정하기에 “일도 안 하는데 어디서 돈이 들어와? 혹시 카드 돌려 막는 거 아니지? 그럼 안 된다. 큰일나.” 했더니 “카드 한 장밖에 없어요. 그리고 들어올 데가 다 있어요?” 하며 웃었다. 걱정스럽긴 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무리 친해도 상대방에 관해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다. 희한한 것은 이렇듯 가끔 돈을 꾸어가도 그에게서는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건데, 그건 아마도 그가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궁핍해 본 경험이 많지 않으니 비루함이 몸에 배지 않았겠지. 아무튼 빌려 간 돈도 약속한 날보다 늦어질 때가 있긴 했어도, 매번 상환했다.
내 주위에는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나보다 훨씬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많다. 희한한 건 내 주변에 그들의 '베짱이 삶'에 대해 흉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후배의 경우, 애인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심술을 부려도 “그 친구라면 이해가 돼” 하는 분위기다. 가끔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라면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그다운 거야”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뭔 놈의 팔자가 그리 행복할 수가 있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많았다. 물론 지금이야 워낙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서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내 가치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인 건 분명하다.
고독이 필요한 시간이 왔다. 혼자 있어 쓸쓸한 그런 고독 말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온전한 고독 말이다. 그간 너무 허접하고 해로운 말을 많이 만들었다. 시기와 질투로부터 초연한 듯했으나 실은 젠체하는 행동이었을 뿐 실제로는 누군가를 험하게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 많은 생각과 불필요한 정보가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것들을 가장 확실하게 정리하는 방법은 바로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순정한 고독의 시간을 갖는 것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일과 나 자신에 집중하며 절대 고독의 시간을 갖는 일이 자꾸만 부딪친다. 10월에는 좀 고독해질 수 있으려나. 그래도 잊지 않고 매번 고독이 필요한 시간을 알려주는 내 마음이, 그와 연동한 몸이 고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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