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뜻밖의 만남 (03-11-토, 흐림) 본문
❚날은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은 주말, 오전에 운동을 다녀왔다. 운동량은 어제와 비슷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운동했다. 집에 돌아와 누나가 사다 놓은 감자탕으로 점심을 했다. 누나는 최근 정신과에 들러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딸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딸 그러니까 나의 조카는 다짜고짜 엄마의 상태가 더 심해지기 전에 당장 병원부터 가보라고 닦달했던 모양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건 분명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다. 엄마의 병증으로 인해 자신들이 겪게 될 ‘귀찮은 상황’이 우려되었을 것이다. 누나는 “딸이 가보라고 해서 가긴 갔는데, 병원에서 준 약, 도저히 못 먹겠다. 머리가 멍해져”라며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원래 정신과 약은 그렇게 사람을 멍해지게 만든대. 하지만 그 약을 먹어야만 치료가 되지’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본인이 저리 싫어하는데도 가라고 강권하면 (정말 우울증이 있다면) 스트레스 때문에 증세가 더 심해질 것 같았다. 그녀도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외로웠던 모양이다. 세월이 참 덧없이 흘러 발랄하고 도도했던 소녀는 벌써 70을 코앞에 두고 있다. 몸도 맘도 많이 약해진 채로 말이다. 쓸쓸한 일이다.
❚오후 5시 조금 지나서 페이스북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목포에 사는 여성 한 분이 인천에 볼일이 있어 오게 되었는데, 꼭 나를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참 낯선 상황이 어서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목포에서 인천까지 왔는데 야박하게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럼 구월동 갈매기에서 만나기로 해요.” 하고 신도림역쯤이라는 그녀에게 환승역과 예술회관 위치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끊고 혼자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 후배 장에게도 연락했다. 장도 페이스북에서 그녀와 친구 사이여서 흔쾌히 합류하겠다고 했다. 7시, 당돌해 보이는 그녀가 노트북 가방 하나를 들고 나를 만나러 왔다. 예술회관 6번 출구를 나와 좀 헤맸던 모양인지 “길치인 나에게 길 못 찾는다고 타박하셔서 그냥 돌아가려 했어요” 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단한 표정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전라도 말투가 자연스레 배어 나왔다. 고향은 광주라고 했다. 시집은 아직 없지만, 현재 시를 쓰고 있고 미혼이며 생업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지만, 묻진 않았다.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말끔한 양복과 코트 차림의 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쯤 지났을 때는 서울에서 윤석열 정권 반대 시위를 마치고 내려온 혁재가 합류했다.❚나는 오랜만에 후배들을 만나서 반가웠고, 그녀는 낯선 인천에서 ‘좋은 오빠들’들을 만나서 즐거웠으며, 장은 여자 후배와 대작하니 좋았을 것이다. 혁재는 그냥 늘 유쾌한 친구니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런 뜻밖의 만남이 매번 기분 좋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용기가 가상했고, 무모함과 젊음이 부러웠다. 9시가 되면서 갈매기는 만석이 되었고, 내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 쪽으로 인천에 살다가 여주로 이사한 한의사 주연과 후배 민수가 보였다. 후배들은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했다. 주연은 좀 말랐고 민수의 얼굴은 더 까매져 있었다. 10시가 넘어서면서 취기가 몰려왔다. 나는 그녀와 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술집을 나왔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만남의 의미를 복기하려고 일부러 역까지 걸어가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공기에 물기가 잔뜩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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