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입추(立秋), 후배를 만나다 (8-07-Sun, rain) 본문
지난밤에도 많은 비가 내렸지만 한낮에는 잠시 날이 개었다. 하지만 언제든 비를 뿌려도 이상할 게 없는, 잔뜩 흐린 하늘이 오후 내내 이어졌다. 바람은 제법 불어 가로수 우둠지들이 우쭐우쭐 춤췄지만 시원하진 않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은 온몸을 비닐랩처럼 감쌌다. 오늘은 절기상으로는 입추였지만, 전혀 가을 느낌이 나질 않았다. 오후에는 지난주에 받은 문화재단 관련 과제를 처리할까 생각했는데, 후배 은준과 시인 명수가 제물포로 불러냈다. 집에서 쉬고 있을 때는 누가 연락해도 좀처럼 나가질 않는 편인데, 백령 면옥에서 냉면을 먹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은 이미 식당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통 평양식 물냉면은 언제나 옳다. 물냉면과 수육, 빈대떡이 아니었다면 안 나갔을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식당은 브레이크 타임이어서 손님을 받지 않고 있었는데, 후배들이 미리 내 냉면을 주문해 놓아서 나는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명수와 은준이는 이미 소주를 두어 병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취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냉면과 빈대떡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낮술이었다.낮술 또한 언제나 옳다. 저녁 술고래다 항상 맛있다. 이 식당은 수육이 맛있다며 명수는 나를 위해 수육을 주문해주었다. 다시 소주 한 병 더!
그곳을 나와 근처 막걸릿집 '흰 고개 검은 고개'에 들러 동동주를 마셨다. 사장은 나를 알아보고 무척 반가워했다. 역시 오랜만에 대학시절 학사주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사장님께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틀어달라고 부탁해 서너 번 반복해서 들었다. 대학시절 강촌이나 대성리로 엠티를 갔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적당한 취기와 레트로 분위기의 술집, 게다가 정태춘의 노래까지 곁들이니 다시 그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절기상 입추인 오늘, 후배들 만나기를 잘했다. 많이 취한 명수는 먼저 돌아가고 술발이 오른 은준이와 동동주 서너 병을 더 마신 후, 계산까지 끝내고 나오려는데, 반바지 차림의 정균이가 불쑥 들어왔다. 최근 도화동으로 이사해서 혼자 술 마시러 이 집에 자주 온다고 했다. 정균이와 한 잔 더하겠다는 은준이를 놔두고 먼저 일어나서 술집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세차게 비가 쏟아졌다. 다행히 술집 앞에서 우리 집까지 한 번에 오는 버스가 있어서 택시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도 비는 한결같이 거겠다. 정거장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비를 쫄딱 맞았다. 불쾌하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했다.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도 연신 땀이 났다. 일요일 밤인데도 술집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전히 더위가 맹렬한 여름의 한복판에서 맞은 입추, 마음만은 이미 가을 들판을 달리고 있다. 올 가을에는 뭔가 재미있는 일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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