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어제 내가 한 일이 옳은 일이었으면 좋겠다 본문
어제 갈매기에 들렀다가 시립극단 배우인 후배 강을 만났다. 일행들과 함께 ‘우르르’ 들어온 그녀는 “오늘 제 생일이에요. 여기 오면 왠지 선배님 있을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갈매기로 왔어요.”라며 아는 체를 했다. 그때 나는 일찍부터 낮술을 먹고 있던 (갈매기가 3차라고 했다) 선배 L과 후배 최의 자리에 ‘불려 가’ 앉아 있었다. 안 들었으면 모를까 후배가 생일이라는데 모르는 체할 수 없어서, 3만 원짜리 아귀 수육을 주문해 주었다. 안주가 나오자 강은 일부러 일행들에게 “선배님께서 제 생일이라고 시켜준 안주입니다.”라며 큰 소리로 말했고, 일행들은 일제히 “잘 먹겠습니다” 하며 손뼉을 쳤다. 멋쩍었지만, “맛있게들 드세요.”라고 나도 웃으며 인사했다. 움직일 때마다 부축해 주어야 하는 L 선배와 최가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화장실에 갈 때면 강은 잠깐씩 내 자리에 와서 술을 따라주고 그간의 안부를 묻곤 했다. 강의 테이블은 누군가가 가고 나면 새로운 사람이 와서 그 자리를 채웠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무척 유쾌한 사람들이다. 일상의 대화조차 연극 대사 같다.
L 선배는 전작이 있어 이내 일어설 줄 알았는데, 나를 불러 앉히고도 두어 시간 더 ‘견뎠다.’ 혼자 그를 상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후배 강도 우리 테이블 쪽을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이제 보내드리세요.’ 하며 눈짓, 턱짓을 보냈다. 혼자 그 자리에 있기 너무 불편하고 힘들어 혁재에게 문자를 넣어 갈매기로 오라고 도움을 청했다. 문자를 보낸 지 30분 만에 혁재가 도착했다. 혁재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있던 최에게 “지금 나누는 대화를 L 선배는 술 깨고도 기억하실까?” 했더니 최는 “그럼요. 기억할 거예요.” 했다. 그 대답을 듣고 난 후 나는 작심하고 L 선배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다.
“형, 저도 어디 가면 선배 소리를 듣는 사람인데, 선배에게 필요한 게 뭐겠어요. 가오 아닙니까. 그런데 형의 지금 모습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요. 건강을 생각하셔야지요. 알다시피 형과 술을 마시면 후배 중 누군가는 반드시 형을 부축해서 집까지 모셔다 드리잖아요. 그거 만만한 일 아닙니다. 형, 최도 낼모레 나이 육십이에요. 이 친구가 언제까지 그 일을 해야 하나요? (이제껏 최가 그의 수발을 전담했다. 그런 면에서 최는 의리 있는 후배다) 형 하나를 집까지 모시려면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하잖아요. 형, 죄송하지만 그건 민폐라고 생각합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자기 발로 집까지 걸어갈 수 있을 만큼만 드시라는 거지요. 그럴 자신이 없다면 원거리 음주하지 마시고, 집 근처에서 드시거나 조금만 드셨으면 합니다. 죄송해요. 형. 형을 좋아해서 드리는 말이에요. 형만 보면 안쓰러워 죽겠습니다. 이게 뭐예요. 후배들에게 가오 다 떨어지게…….”
내 말을 듣는 동안 L 선배는 “건방지게……” 하며 풀린 눈으로 나를 쏘아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자 나중에는 “그래,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노력 하마.” 하며 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모멸스러웠을 것이다. 평생을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로서는 앉아 있기 불편한 자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그의 건강이 제일 걱정이 되었고,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그가 도저한 의지로 지금의 음주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그는 점점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인들은 대부분 그와 술 마시기를 꺼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껏 그의 후배나 지인들과 동석해서 술을 마셔본 결과, 그 누구도 선배에게 나와 같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원하는 말이나 해주고, 보고 싶어 하는 포즈만 취하다가 그가 술에 취하면 (후배 최를 제외하고는) 슬며시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경우만 늘 보아왔다. 가끔은 그들의 눈에서 부담과 경멸을 읽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게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오늘은 작심하고 선배에게 쓴소리를 던진 것이다.
말을 마치고 마음이 불편해 담배 피우러 나갔더니 갈매기 종우 형이 따라 나와 “잘했어. 계봉 씨. 누군가 한 번은 말해줘야 했어요.”라며 어깨를 툭툭 쳤다. 자리에 돌아와 “형, 제 맘 알지요?”라고 했더니, 다행히 선배는 “알아, 네 마음.” 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시고 일어나세요” 했더니 “알았어” 하고 순순히 일어났다. 선배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올 때, 술집에 가득했던 모든 손님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정체 모를 안도가 느껴졌다. 부축을 받으며 쓰러질 듯 위태롭게 화장실을 다녀오곤 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갈매기 형이 자동차 키를 흔들어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오늘까지만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장사하다 말고 ‘배달’ 간다고 하면 마누라한테 혼나요.” 하며 웃었다. 다행이었다. 택시를 잡아도 태우고 내리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최가 따라갔다. 매기 형이 함께 갔으니 방까지 부축하는 게 그나마 수월했을 것이다.
형을 보내고, 늦게 도착한 혁재와 남은 술을 마셨다. 돌아오는 내내 ‘내가 잘한 일일까. 그렇지 않아도 힘 빠져 있는 사람에게 너무 잔인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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