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산책자의 평범한 하루
그가 준 '상자'를 열며 4월을 보낸다 본문
어제 혁재가 주고 간 담배를 피워봤다. 묘한 맛이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모종의 상황을 만날 때,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종종 다양한 형태의 위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처음 만나는 낯선 상황은 열지 않은 상자처럼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위험함과 경이로움이 반반이라면 나는 내 앞의 닫힌 상자를 여는 편이다. 위험하다면, 그 위험의 정체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안전하고 무탈하게 답답한 것보다 위험하지만 다채롭고 재밌는 게 훨씬 매력적이다. 나의 가수 혁재는 가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상자를 내게 쥐어주곤 한다. 그는 내가 매번 그 상자를 열어볼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상자를 건네주면서도 반드시 열어보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혁재의 상자에서는 재밌는 게 나올 때도 있고 위험한 게 나올 때도 있다. 위험함은 물론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우수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 놓인 닫힌 상자의 완강한 침묵을 용인할 수 없는 나는, 상자 속 내용물이 형태가 있는 것이든, 누군가에 관한 소문이나 평판처럼 형태가 없는 것이든 간에 해당 내용물에 지나치게 몰입한다. 그 극강의 감정이입이 나를 종종 위험하게 만든다. 물론 혁재는 내가 위험에 빠지는 걸 즐기려고 상자를 건네는 건 아니다.(아닐 것이다!) 그가 닫힌 상자를 건네는 것은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법이다. 나 역시 혁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건네는 상자를 매번 열어 기꺼이 위험과 마주하곤 한다. 심각하게 위험해진다면, 그 위험에서 나를 건져내기 위해 가장 먼저, 가까운 곳에서 손을 내밀 사람도 결국 혁재일 것이다. 엊그제 전해 받은 닫힌 혁재의 상자를 열며 4월을 보낸다. 열린 상자 속에서 익숙한 얼굴들과,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과, 나를 상심의 강으로 내몰곤 하던 쓸쓸함, 미움, 증오 따위의 상념들과, 끝내 나를 떠나지 않은 그리움들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온다. 무망한 바람이지만, 5월에는 조금은 행복하고 덜 위험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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