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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서평]휘황한 자본의 왕국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기 본문

리뷰

[서평]휘황한 자본의 왕국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기

달빛사랑 2015. 11. 30. 12:00

휘황한 자본의 왕국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기

-김시언 시집 도끼발, 문학세계사, 2015

 

문계봉(시인)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그럴 듯한 말로 치장하고 있지만 기실 자본 중심의 시장질서 재편 의도를 그악스럽게 관철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현실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선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삶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최종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공장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난맥이 결코 아니다. ‘일하는 사람들(노동자)’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은 한 집안의 가장이거나 가계 수입의 유력한 주체이기에 그들의 불안한 삶은 자기 자신은 물론 그 수입에 의존하는 가족들의 단란하고 안정적인 삶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거대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한낱 부속품으로 취급되며 자본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기에 항시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김시언의 시들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주변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너무도 핍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직접 체험한 실제 경험 속에서 획득한 정서를 시로 옮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시 속에 등장하는 그 모든 주변인들의 삶의 모습은 바로 시인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대상들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의 시 속에는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생선행상을 하는 아낙(나이테가 촘촘해진다), 독거노인(쿠쿠), 고물이나 박스를 주워 파는 노인(계근대’, ‘어느 할머니의 자화상), 노숙자(서울역 빙어’, ‘외출’, ‘봄꽃), 실업자(소파’, ‘심해 오징어), 비정규직 사원(인턴’, ‘인턴기자’, ‘골똘하다’, ‘돼지웃음’, ‘모르는 사람’, ‘슬리퍼를 신어도 될까요’, ‘모두는 모두가 아니다) 알바생(어려운 계산)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외계층과 주변적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다. 주변인들에 대한 이러한 전 방위적 관심과 시선은 아마도 시인 자신과 그들이 동병(同病)을 앓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상련(相憐)이자 상련(相戀)의 정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지만/떨어진 닻은 끝없는 심해로 내려간다

과외받는 아이들이 다 잘려 나갔지만/병든 어머니는 밥보다 더 많이 먹는 약을 끊을 수 없고

차라리 닻줄을 끊어 버릴까 망설이다/무저갱 속에서 허방 디디며 길을 찾는다

닻을 내릴 때마다 닻나무에서 이파리가 떨어진다(....)

-내겐 닻나무가 있다중에서

 

시인 자신도 밥보다 더 많이 먹는 약을 끓을 수 없’(내겐 닻나무가 있다)는 병든 노모를 모시고 힘든 삶을 살지만 끊임없이 하늘색 꿈일 것이 분명한, 그러나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잴 수 없는 수심을 향해닻을 내린다. 하지만 닻은 그 무언가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심해로 내려갈 뿐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저갱 같은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아예 꿈꾸기조차 포기해 버릴까 망설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에 감정을 이입하여 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가슴이 한없이 먹먹해진다. 그러나 시인은 좌절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버티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안경나사가 빠졌다/호치키스 심 하나를 떼어내/구멍에 넣고 힘껏 돌렸다

일 년 반이 지났어도/끊어지지도 풀어지지 않는다

그 마음으로 일하나/세금 빼면 얼마 안 된다고

억울한 임금 체계라면서도/버티는 건 호치키스 힘에서 나올 것이다//하루하루 잇는 사다리

-‘사다리 전문

 

(....)

혼자 사는 일이 얼마나 홀가분하겠냐는 이들은

그만큼 등짐이 무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끔 하늘에서 관리비도 떨어지고

베란다 항아리에 쌀도 가득 담긴다며 깔깔대지만

엄연히 나는 노후 대책을 세우지 못한

성인남녀 오십팔 퍼센트에 끼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과외 상담만 하고 수업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출판사에서 일한 돈이 나오지 않을 때

충무로 인쇄 골목에 큰불이 났을 때

가방은 여전히 무겁다는 사실을

생각은 뭉치고 결린 어깻죽지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생각은 어깻죽지에서 나온다 중에서

 

생의 치열함에 비해 형편없는 급부, 그러나 그녀는 버틴다. 그리고 시인은 척박한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의 근원을 알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삶의 무게가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삶의 무게를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현실의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경험을 통해 확실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뭉치고 결린 어깻죽지란 현실에서 겪는 삶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시인을 움직이는 것은 공허한 관념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구체적인 삶의 무게감이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시인이 현실의 고통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려 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철저하게 관철되는 현실의 완강함 또한 결코 만만하지 않다. 아무리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하더라도 인턴 혹은 비정규직 사원은 구별을 위한 비표인 비정규직이란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는 한 같은 회사 내에서도 정당한 대우를 결코 받지 못한다. 경제적 차별뿐만 아니라 그것은 심리적 모멸을 정당화 시키는 변수가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나이 어린 선배가 허구한 날 명령을 내릴 때도 스물아홉 살 나이 따윈 잊어야 하고, ‘메뚜기처럼 빈자리를 찾는 일이 힘들다고 내색하지도 말아야 한다.(인턴 중에서) 또한 사무실에 놓인 감귤을 정규직들은 자연스럽게 드나들면 까먹는데 반해 비정규직 사원의 경우는 흘낏, 눈으로만 귤을 까먹을 수밖에 없으며(골똘하다중에서), 심지어는 회사의 발전을 기원하는 고사 자리에서조차 비정규직 사원은 소외되고 만다.(돼지웃음). ‘모두 참석하라는 회식 광고를 보고 선약을 하나씩 지우고/허기 대신 대리기사 전화번호를 확인하지만 아무도 여자에게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는다.’(‘모두가 모두가 아니다 중에서). 결국 비정규직 사원인 여자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따로 회식을 조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과 심리적 모멸의 상황은 아마도 자본의 대사회 지배력이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슬픈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은 인턴이나 비정규직 인물을 소재로 한 시의 경우 마침표 대신 쉼표로 끝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턴’, ‘골똘하다’, ‘돼지웃음’, ‘김 차장은 등이 그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무저갱 속에서 허방 디디며 길을 찾는’(내게 닻나무가 있다) 것 같이 끝도 없는 차별과 모멸의 시간이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시인의 문제의식을 의도된 형식으로 표출한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모든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러운 현실에 대해 투항하거나 비감한 모습만 보이고 있지는 않다. 시인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들은 자신들도 익히 겪어서 알고 있는 세상의 난맥들을 시인들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만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시인들이 치열한 고민과 건강한 상상을 통해 이 추문 많은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보존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시를 통해 보여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는 시와 시인의 온당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을 안 해. 밥 다 됐다고 안 하네/밥맛은 똑같은데, 뭣 때문에 삐쳤는지 입을 통 안 열어

쿠쿠 애프터서비스 센터 문이 열리자마자/커다란 보자기를 든 노인이 들어선다

기사는 버튼을 여기저기 눌러 본다/음성 기능 센서가 고장났어요, 이제 말문이 트일 겁니다

집에 돌아온 노인이 밥을 안친다/전화 왔습니다, 전화 왔습니다

일이 생겨 주말에 또 못 온다는,/맛있는 거 많이 사 먹으라는 며느리다

걱정일랑 말아라/노인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린다

잠시 후, 치지직 수증기가 터지더니/밥솥이 경쾌하게 알린다

밥이 다 됐습니다, 저어 주세요, 쿠쿠/쿠쿠,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장단을 친다

알았다, 쿠쿠! 잘 먹겠다, 쿠쿠/밥주걱을 수돗물에 적셔 밥을 푸고는

시어빠진 김치 국물로 밥상을 차려 노인/볼륨이 잔뜩 키워진 텔레비전 앞에 다가앉는다

-‘쿠쿠전문

 

독거하는 노인의 일상이 진솔하게 드러난 이 시에서 우리는 초라한 밥상 앞에 앉은 쓸쓸한 노인의 삶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음성 알림 기능이 있는 밥솥과 대화를 나누는 노인이라니, 그 상황만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지만, ‘알았다, 쿠쿠! 잘 먹겠다, 쿠쿠!’ 하며 밥솥의 알림 소리에 화답을 하는 노인을 보며 독자들은 유쾌함마저 느끼게 된다. 삶은 고달프고 힘들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은 건강한 생명력, 나는 여기서 희망을 보게 된다. 그것은 주변인들의 희망이자 시인의 희망이기도 할 것이다.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에 무리지어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의지와 소박한 희망을 움켜쥔 채 서서히 외곽으로부터 자본의 신기루들을 해체하며 중심을 조여 오는 주변의 들풀들, 장엄하지 않은가. 희망은 바로 거기에 있고, 그 희망과 함께 할 때 시와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김시언의 시선이 거기에 닿았다는 것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미쁘다. 하여, 그녀의 시 속에 등장하는 숱한 주변인들의 희망을 위하여 그리고 그 희망과 함께 하는 시인의 마음에 격려와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김시언의 시편들은 이 글에서 논의된 것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결핍과 배고픔(밥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드러나는)이나 재생(‘’), 타인에 대한 배려(‘봄꽃’), 부모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 우연히 접한 아름다움(‘능소화’)과 같은 정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글의 성격이 시집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도 아닐뿐더러 지면상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주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적 어려움을 형상화한 시집 속 4부의 작품들에 주목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하여 견강부회와 오독은 한 명의 독자로서 나의 시 읽기 능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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