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주말의 불편한 고요함 (3-15-토, 맑음) 본문
나의 주말은 너무 평온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는 나의 평온함의 근거와 정체를 의심하기 때문에 오늘 같은 평온함이 나에게는 오히려 불편하다. 마치 내 몫이 아닌 행복을 임시로 맡아두었거나 공짜로 누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라 공원에라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울 앞에서 몇 차례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관뒀다.
집 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일부러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꽉꽉 눌러놓거나 서가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서랍장의 양말을 손 볼 게 없는지 찾아보다가 그만두고 채소를 사러 가게에 다녀왔다. 날이 너무 좋아 긴팔 패딩을 벗고 조끼 패딩을 입고 외출했는데 전혀 춥지 않았다. 봄기운이 완연했다. 가혹한 정치와 탐욕의 화신들만 아니었다면 참 아름다운 주말 아침이라고, 만수역 1번 출구 파리바게뜨 앞을 지나며 생각했다.
카트를 가지고 가지 않아 장은 간단하게 봤다. 오이와 숙주, 두부와 풋고추, 칼국수면을 산 후 계산하려는데 오늘도 지난번처럼 카드 결제기가 고장 났다며 현금 계산을 요구했다. “아직도 안 고쳤어요?” 하며 약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더니, “죄송해요. 다음 주에는 반드시 고칠 거예요” 했다. 지난번 계산할 때 “현금 없는데요” 했더니, 계산대 아주머니는 손가락으로 자기 뒤편 벽을 가리켰었다. 그곳에는 새마을금고 계좌번호가 적혀 있었다. 휴대전화를 이용해서 계좌 이체해 주었다. 하지만, 지난번(28,000원)과 이번 결제 금액(12,000원)의 합계는 4만 원, 지역화폐(예술가-이음 카드)로 계산했다면 10%를 정립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게의 사정으로 4천 원을 손해 본 셈이다. 4천 원이면 이 가게에선 양배추 2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술값은 몇만 원씩 아낌없이 내면서도 이런 사소한 손해에는 짜증을 낸다.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이다.
오후에는 홈쇼핑으로 라면을 주문하고, 옷장을 정리했다. 유튜브에서 ‘옷 예쁘게 개는 법’을 검색했더니 수많은 영상이 올라왔다. 정말 생활의 천재들 같았다. 어쩜 그렇게 반듯하고 예쁘게 옷을 개는 것인지 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그야말로 곳곳에 숨은 고수들이 많기도 많다. 나도 영상에 나오는 방법을 참고해서 바지와 웃옷들을 정리했다. 특히 청바지를 김밥처럼 돌돌 말아 서랍에 넣었더니 수납공간이 여유로워졌다. 그리고 저녁까지 긴 낮잠을 잤다. 일어났을 때, 뻑뻑했던 눈이 부드럽게 풀려 기분이 좋았다.
한가해지면 잡념과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올까 봐 시종일관 끊임없이 나를 부산하게 만들었던 하루였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무기력하게 부조리한 상황을 지켜보거나, 내 이웃들이 만든 평온함에 무임 승차할 때가 더욱 불편하다. 이 미안함과 불편함의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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