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먼저 다가가는 마음의 힘 (10-26-토, 맑음) 본문
환절기라서 그런지 10월 중순을 넘어서며 지인들의 부고가 일주일에 두어 개씩 도착한다. 부고를 받았을 때, 나와의 친소(親疏) 관계에 따라 부의(賻儀) 금액과 빈소 방문 여부를 마음속으로 결정한다. 물론 어떤 부고는 마음으로 애도할 뿐 부의도 빈소 방문도 하지 않는다. 대개 내가 속한 단체의 중앙조직에 보내는 부고에 그런 경우가 많다. 회원 조직에서는 각 회원의 경조사를 타 회원들에게 알리는 게 상사(常事)다. 내가 속한 한국작가회의도 마찬가지다. 인천지회야 자주 만나고 회원끼리 서로 알고 있으므로 경조사에 서로 부조하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전국의 모든 회원을 관리하는 본회에서 보내는 부고 중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낸 부고가 대부분이다. 내가 아무리 정이 많은 사람이더라도 본회에 가입한 모든 회원(2천 명이 넘는다)의 경조사를 챙길 수는 없는 것이다.
어젯밤 늦게 후배 S의 모친 부고를 받았다. 부고에 달린 링크에 접속해 보니 고인의 연세가 75세였다. 일단 너무 젊은 나이에 운명했다는 게 무척 안타까웠고, 후배 S가 68년 생인데 모친이 75세밖에 안 됐다는 게 놀라웠다. 결혼을 무척 일찍 했던 모양이다. 물론 젊은 시절 고생도 많았겠지만, 이제는 3형제가 다 장성해서 나름 자리를 잡았고, 특히 S는 문화단체 본부장도 역임할 정도로 지역에서 꽤 이름 있는 명망가가 되었으니, 남은 삶은 성공한(?)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며 즐겁게 살아 보려고 했을 텐데, 고약한 운명이 한 인간의 소박한 바람(願)을 이런 방식으로 훼방 놓는 걸 보면, 인간의 삶이란 참 허무하기 그지없다. 처음 부고를 받았을 때 빈소가 한림병원 장례식장이라고 나와 있어 서울에 있는 한림대학병원 장례식장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계양구 삼산동에 있는 병원이었다. 지난번 임종우 선배의 모친 빈소도 이곳이었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번 이곳을 찾아왔던 기억은 있다. 다만 그때는 지금처럼 깨끗하게 인테리어 하기 전이어서 무척 좁고 옹색해 보였다. 아무튼!
S와 나의 관계는 연조가 깊다. 젊은 시절 함께 노동운동을 했고, 그가 예술단체의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었을 때는, 일부러 불러내 밥도 사주고 용돈도 주곤 했다. 수십 년간 그와 나는 동지이자 막역한 선후배로서 거친 세월을 함께 통과해 왔다. 그는 타고난 감각과 순발력으로 이후 지역 문화계에서 승승장구했고, 반대로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주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형님도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셨잖아요” 하며 내게 생활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인천 문화계에서 점점 입지가 높아질수록 어느 순간부터 애초의 순수함을 상실하고 점점 관료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한 5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우리는 크게 부딪쳤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후배가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전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로서가 아니라 ‘지금은 내가 문화 예술 쪽에서는 형보다 훨씬 지명도가 높아요. 알기나 해요?’라는, 다소 교만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지역의 많은 동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생각이어서, 당시 그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동지를 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후에 그는 내게 사과했고 나도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마음에 두지 마라’하고, 표면적인 화해를 했지만, 그와 매우 친했던 나로서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고,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그의 행동거지와 어깨에 들어간 힘이 보기 싫어서,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겉으로는 웃지만) 솔직히 그를 보는 게 편하지 않았다. 최근까지 그야말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하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부고를 받았을 때, 조의금만 보낼지 빈소까지 방문해서 조문하고 올지를 잠시 고민했다. 어른답지 못한 고민이라는 걸 알지만,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어쩌겠는가. 하지만 ‘이건 어른이자 선배의 태도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기에 빈소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오전에 수홍 형이 전화해 저녁 6시쯤 함께 빈소를 방문하자고 전화했지만 거절했다. 저녁에 가면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술자리 또한 길어질 게 명약관화였기 때문이다.
11시에 집을 나섰는데,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혀 빈소에 도착하니 12시 20분이었다. 한림병원 앞까지 전철이 가지 않아 버스로만 이동했더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행히 버스는 병원 앞에서 정차했다. 지하 VIP 빈소를 방문했을 때조문객은 한 명도 없었고, 친척과 형제들만 담소 중이었다. 나를 본 S와 그의 아내 J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았다. 나는 영정 앞에 꽃을 올리고 기도했다. 상주들과도 맞절하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무릎 아픈데 절하지 마. 앞으로 조문객들 많이 올 텐데 무릎 아껴야지” 했더니 그들 내외도 웃으며 “와 주셔서 고마워요. 식사하셔야지요?” 하며 내 손을 잡아 왔다. 생각보다 따듯했다. 그러면서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그 짧은 사이에 희한하게도 그간의 모든 감정의 응어리가 녹아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셋이 앉아 대화하다가 다른 조문객이 와서 S는 “잠깐만이요, 형” 하며 자리를 떴고, 아내인 J는 내가 식사하는 내내 말벗이 돼주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매우 천진하고 밝은 친구다. 그렇게 한 시간쯤 빈소에 머물다 일어섰다. 두 사람이 입구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장례식장을 나와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그냥 걷고 싶어서 작전역 방향을 행인에게 묻고는 무작정 걸어갔다. 막상 걸어보니 병원에서 역까지는 네다섯 정거장 떨어진 제법 먼 거리였다. 솔직히 걸어올 거리는 아닌 듯했다. 오늘따라 햇볕은 한여름처럼 뜨거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반소매 차림에 손부채질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빈소를 가느라 긴팔 티셔츠에 바바리를 입고 있던 나는 땀을 비 오듯 흘렸다. 하지만 마음만은 가볍고 환한 느낌이었다. 뭔가 오랜 묵은 마음의 부담 하나를 털어버린 느낌이었다. 걷는 내내 ‘오길 잘했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람의 얽힌 관계나 서로 간의 오해는 머릿속 생각만으로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 고통스럽더라도 일단 부딪쳐보는 것, 진정성 있는 태도로 내쪽에서 다가가 먼저 말을 거는 것, 그게 문제 해결의 가장 곧고 빠른 길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른답게 행동한 나 자신을 오는 내내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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