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평범한 하루
고향 후배를 만나다 (10-25-금, 맑음) 본문
45년 만에 동네 후배를 만났다. 희한하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얼마 전 후배 은준이 신포동에서 사진작가인 내 친구 임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오늘 만난 후배 광규를 처음 보았던 모양이다. 은준은 며칠 후 "엊그제 술자리에서 형 후배를 만났어요. 나보다는 선배인데, 그분이 형을 잘 안다며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하며 광규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번호를 저장해 놨었는데, 오늘 오전 그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화면에 이름이 떠서 전화를 받자마자 "어, 광규야, 오랜만이다" 하고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와, 형님, 이게 몇 년 만입니까? 저 기억나세요?" 하며 감동하는 눈치였다. 사실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내 친구 옥규의 친동생이어서 어릴 때 자주 같이 어울렸을 게 분명하다. 물론 흘러간 세월이 있어, 길 가다 만났다면 못 알아보고 지나쳤겠지만 '어릴 적 동생 광규'인 것을 의식하고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형, 오늘 소주 한잔합니다. 저번 때 봤던 형의 후배(은준을 지칭)도 연락해서 같이 봐요. 몇 시가 좋아요?" 하며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만남을 기정사실화하고는 장소와 시간을 묻기까지 했다. 사실 어제 상훈과도 계획에 없던 술자리를 가진 터라서 이번주에는 무알코올로 지내려고 했는데, 바로 이튿날 술 마시자는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술꾼은 정말 금주하기가 너무 어렵다. 술자리가 부담스러웠지만 수십 년 만에 내가 보고 싶다며 일부러 연락한 후배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후 6시 신포동 메밀집 '청실홍실' 앞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끊고 은준에게 연락했더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오늘은 쉬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가고 있을 때, 신포시장 입구쯤에서 광규가 연락했다. "형, 오시고 계세요? 다른 게 아니라 나는 지금 청실홍실 앞에 와 있는데, 혹시 형이 나를 못 알아보실까 봐 연락드렸어요. 흰색 티셔츠 입은 게 나예요" 했다. 나는 "야, 왜 못 알아봐. 나도 다 왔어"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혹시 정말 못 알아보면 어쩌나 내심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확실히 하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 전화했더니 저쪽에서 광규가 "형님, 여기요" 하고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를 보는 순간,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다가올수록 어릴 때 보았던 그의 얼굴이 확실히 떠올랐다. 그는 나의 손을 잡으며 "형,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했지만, 그건 인사치레였을 것이다. 5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안 변했겠는가?
일단 근처 윤식당에 갔다가 자리가 없어 다복집에 들러 오랜만에 스지탕을 먹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내 안부를 묻고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후배 광규가 살아온 삶도 예사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었다. 특전사 하사관으로 생활하다 전역했고, 친형 옥규와는 현재 사이가 좋지 않아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으며, 신포동에서 25년 간 꼬치구이 전문 술집 '투다리'를 운영했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캐릭터 사업을 벌였다가 그간 번 돈을 말아먹고는 현재는 청소업체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신포동에서 자주 술 마시던 나와도 몇 차례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나는 신포동 투다리에 자주 들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아마 봤어도 몰랐을 것이다.
신포동에서 오래 장사했던 터라서 그 지역구에 출마한 국회의원, 구청장 후보들과도 잘 알고 있었고 내 친구들, 이를테면 특전사동지회 인천지부장인 은수, 인력사업은 물론 옛 국일관 영업부장 출신인 건달 찍길이, 신포동에서 옷장사하는 선호 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은수에게 전화해 "지부장님, 저 계봉 형님과 같이 있는데, 두 분이 아는 사이라고 해서 놀랐습니다" 하며 기어코 아는 사이임을 인증했다. 유치하고 우스웠지만 한편으로 귀엽기도 했다. 나이 60 먹은 녀석이 하는 짓이 꼭 아이 같았다. 성격은 시원시원했으며 마초들 특유의 허세와 껄렁거림이 있었으나 팔은 안으로 굽어서 그런가 동네 선배인 내 앞에서 보이는 그의 그러한 허세가 밉지 않았다.
다복집을 나와서 근처 '흐르는 물'에 들러 맥주를 마셨다. 당연히 사장과는 광규와 나 둘 다 잘 아는 사이여서 우리 둘이 함께 들어가니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마침 이날 후배 재상이가 흐르는 물에서 공연했다. 공연을 끝까지 다 보진 못하고 중간에 일어나 그가 안내하는 약차(藥茶)를 파는 집에 가서 차를 마셨다. 사장에게 '누나'라고 하는 걸로 봐서 자주 왔던 모양이었는데, 알고 보니 사장은 내 후배 심(기성의 아내)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산삼 캐는 여성 심마니'로 유튜브에서도 꽤 알려진 여성이었다. 그녀가 만들어준 '정체불명'(가격 13,000원)의 약차를 마셨더니 속이 무척 개운해졌다. 생각보다 맘에 들었다. 광규는 "형, 괜찮지요? 난 술 마시고 집에 가다 꼭 여기 들러서 이거 한잔 마시고 가요" 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사는 집은 카페 바로 뒤에 있는 원룸 오피스텔 '포트뷰'였다. 이 집에 얽힌 나의 추억도 상당한데, 광규가 그곳에 살다니, 여러 모로 재미있었다.
내가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 술값, 찻값을 모두 광규가 계산했기 때문에 (빚지고는 못 사는 내 성격상) 조만간 다시 만나야 할 것 같다. 오랜만에 나도 아득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문화재단 앞에서 15번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시간도 이르고, 술이 좀 모자라는 것 같아서 간석동쯤 와서는 성식이의 카페 '산'에 들러 한잔 더 할까 생각했지만, 의지로 유혹을 이겨냈다. 다만 돌아오는 길, 순댓국을 사와 맛있게 먹었다. 아쉽게도 단골집인 '眞신포순대'는 문을 닫아 바로 옆에 있는 '진천순대'에서 사 왔다. 이 집 순댓국도 괜찮았다. 가격도 2천 원이나 저렴했다. 앞으로 이 집에도 가끔 들러봐야겠다. 연이틀 술 마셨지만, 음주량을 조절해서 그런가 체력적인 부담은 별로 없다. 다만 체중이 늘 것 같아, 그게 걱정일 뿐. 살아 있으니 인연들은 어디에선가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 사람의 관계란 참 신비하다.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향집에 얽힌 마음 (10-27-일, 흐림) (1) | 2024.10.27 |
---|---|
먼저 다가가는 마음의 힘 (10-26-토, 맑음) (1) | 2024.10.26 |
추모식 날은 왜 매번 추운 건지 (10-24-목, 맑음) (1) | 2024.10.24 |
수상하게 깊어가는 가을 (10-23-수, 구름, 맑음) (3) | 2024.10.23 |
내게 온 시집들 (10-22-화, 종일 비) (1) | 202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