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산책자 계봉 씨의 하루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10-14-월, 흐림) 본문
종일 흐렸다. 점심 먹고 돌아올 때 빗방울 잠깐 떨어졌지만 이내 그쳤다. 후배가 찾아와 우리 방 식구들과 함께 점심 먹었다. 오후에 수필집 의뢰인이 윤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도 통 받질 않는다며 최후통첩 같기도 하고, 여전한 하소연 같기도 한 장문의 문자를 연달아 보냈다. 답장하지 않았다. 윤 대표에게 보낸 문자를 복사해서 내게도 보냈을 것이다. 문자에는 애원과 원망, 한탄과 분노의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어떤 문자에서는 “모든 조건을 수용할 테니 연락 부탁드려요”라며 사정하고 있었고, 또 어떤 문자에서는 “이건 사업자의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하소연이든 분노든 그 어떤 것도 윤 대표에게 접수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는 출판사 다섯 곳으로부터 견적서를 받아 윤 대표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다섯 곳 중 가장 비싼 견적서를 제시한 출판사 수준으로 계약하겠으니 연락해 달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윤 대표는 묵묵부답이었다. 윤 대표와 의뢰인 사이의 문제는 단지 출판 비용 문제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작업 방식의 차이 때문이라는 걸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윤 대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저희는 안 합니다. 그 견적서 받은 출판사들과 협의해서 좋은 책 만드세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윤 대표의 책과 출판에 대한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 대표의 처사가 매우 서운할 것이다.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일 거고.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게 문제다. 윤 대표에게는 돈보다는 의리가 먼저고 속도보다는 질(質)이 우선이다.
퇴근 무렵, 갈매기에 들러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속이 더부룩하고 요즘 체중도 좀 는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무엇보다 최근 지출이 너무 많기도 했고. 이번 주는 조신하게 지낼 생각이다. 뭐, 누군가가 연락해 오면 할 수 없이 만나기야 하겠지만,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진 않을 작정이다. 하긴 그동안 내가 먼저 연락한 건 혁재에게 한 전화 말고는 없지만.
맑은 가을하늘도 그 나름 좋지만, 흐린 가을하늘도 나는 괜찮다. 김광석의 노래 중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곡이 있다. 그 노랫말 중에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히어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가사가 있다. 그래, 내 지난 시절의 잊힌 꿈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열 통, 아닌 백 통이라도 저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쓸 용의가 있다. 그 모든 편지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겠지. “안녕, 나야.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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